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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May 10. 2022

어쩌다 동티모르

UN 소속도, 뉴스 리포터도 아니지만.

버스보다 비좁은 호주 지역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다윈에서 동티모르에 왔을 때, 그곳의 현지인들은 내가 UN 소속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의 기차역 만한 국제공항에는 UN 전용기 몇 대가 서 있는 게 다였다. 내가 UN 직원이 아니라고 하면, 그들은 뉴스 리포터이냐며 되물었다. 내 목에 걸린 카메라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티모르를 찾는 사람들은 여행자보다는 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 시내 거리에 온전한 건물들은 거의 없었다. 벽돌을 쌓아 만든 담장이 죄다 무너졌거나 철근이 튀어나와 너덜너덜’이라는 말이 도시의 전반적인 인상을 표현하기에 제격이었다. 그런 건물들 사이사이 도로에는 굵은 글씨로 UN이라고 적힌 차들이 빈번하게 눈에 띄어 언젠가 TV <해외 뉴스>에서 보던 어떤 전쟁국가의 장면들을 연상시키곤 했다. 이런 곳에 배낭을 멘 여행자가 관광지도를 들고 지나가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1.


딜리에 온 지 삼 사일 정도 지난날,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길에서 보던 UN차 한 대가 서더니 하늘색 유니폼 모자를 쓴 현지인 직원들이 식사를 하러 들어왔다. 그중 한 직원이 나를 보고는 무슨 영문인지 반갑게 웃으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나를 공항에서 봤는데 외국에서 온 뉴스 리포터인 줄 알고 사진을 찍었다며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가 찍은 사진 속의 나는 꼿꼿이 서서 고개만 90도로 숙여 심각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짧은 며칠 동안 봐온 동티모르의 상황과 연관시키니 내 눈에도 영락없는 뉴스 리포터였다.


남들이 나를 오해하는 직업으로 여기에 왔다면 정말 멋있었겠다는 상상을 해봤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동티모르에 온 이유는 너무 시시해서 오히려 이와는 대조적이었다. 호주에서 인도네시아로 이동하던 길에 동티모르라는 나라가 있는 것을 지도에서 발견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호기심이 생긴 것이 다였다. 알아보니, 오는 방법 또한 간단했다. 내가 있던 호주 다윈에서 비행기로 고작 한 시간, 미리 비자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계획했던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하루하루 이 미지의 땅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누군가가 또 내 신분을 묻는다면 ‘여행자’ 말고, ‘탐험가’라고 대답하는 건 어떨까. 동티모르에서는 이게 좀 더 이곳 사람들의 예상을 덜 빗나가는 답변 같아 보였다.



한국어로는 동티모르, 영어로는 이스트 티모르 East-Timor, 현지어로는 오랫동안 이곳을 점령했던 포르투갈어의 언어인 티모르 레스떼 Timor-Leste라고 부른다. 동쪽을 뜻하는 단어가 언어마다 바뀔 뿐, 티모르 섬의 동쪽이라는 뜻은 모두 같다. 섬의 또 다른 반 쪽은 서티모르다. 그러나 이곳은 나라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속하는 지역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동티모르는 특별하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 작은 땅은 UN의 힘을 빌려 이제 막 나라로서의 명색을 갖춰 나가려는 듯 보였다. 인터넷에서도, 명색이 최신인 가이드북에서도 여행자로서 혹할 만한 아니면, 이 낯선 나라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이렇다 할 정보는 찾지 못했다. 국가로서는 미완성, 여행지로서는 아직 스케치도 하지 않은 곳, 그게 바로 동티모르의 매력이었다.



2.


기온이 35도가 웃돌고 습도는 내 인생 경험 중 최대치였던 동티모르에 도착한 날, 천신만고 끝에 딜리에 딱 하나 있는 호스텔을 찾아낸 것도 기뻤지만 나 말고 다른 여행자들을 만난 것은 감격에 가까웠다. 러시아 커플과 일본인 남자, 딱 세 명이었는데 러시아 커플의 남자는 프로 사진작가였고, 일본 남자는 나와 같은 ‘탐험가’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 영어를 거의 하지 못 해 다른 곳에서 처럼 여행담을 나누며 쓸 만한 정보를 캐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나와 함께 도미토리 방에 묵었던 일본 남자는 딱 두 번 봤는데, 그는 두 번이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미 일찌감치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러 가고 없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대사관 접수대에서 일하는 여자가 불친절하다며 심통이 나 있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봐서 비자를 받아 인도네시아로 떠났거나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가버린 것 같았다.

 러시아 커플은 사진을 찍으러 나갈 때 빼고는 그들의 2인실 방에 들어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여행자들이 그 존재 자체 만으로 마음의 의지가 되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딜리의 주요 교통수단으로는 택시 외에 미크롤렛이라고 부르는 미니밴이 있었다. 현지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정류장이라 알려 주는 곳에 서있으면 꽤 자주 왔지만, 그 수가 승객의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지 항시 만석이었다. 누군가가 내려야 그 자리에 탈 수 있는 상황인데, 내리는 사람은 없고 타려는 사람만 무더기였다. 어쩌다 내리는 사람이 생겨도 왜소한 현지인들의 체구만큼 자리가 비좁아 선뜻 차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뒤에 있던 사람이 겨드랑이 밑으로 치고 들어와 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한 번은 이번에도 글렀구나 하고 뒤로 물러서는데 서 너 명의 남자가 뛰어올라 한 발은 차 안에, 한 손은 미닫이 문 위의 손잡이를 잡아 매달렸고, 미크롤렛은 문을 열어젖힌 채로 출발했다. 여하튼 이런저런 이유로 열 대가 넘는 미크롤렛을 눈앞에서 떠나보내고 간신히 한 번 타 본 이후로 다시는 타지 않기로 했다.



호주 다윈의 도서관에서 찾아낸 동티모르 여행 책에서 복사해온 지도는 실제와 거의 맞지 않았다. 지도보다 실제에 훨씬 더 많은 길이 있었고, 지도에는 거리명이 적혀 있는데 실제에는 표지판이 없어 거리명을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건물에는 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첫날, 텅 빈 골목에서 길을 묻기 위해 문이 열린 아무 집이나 들어갔는데, 우연히도 그곳은 인도네시아 음식을 하는 식당이었다. 안 그래도 식당을 찾고 있었던 참이라, 길 대신 메뉴를 묻고, 인도네시아 음식인 나시고랭막 갈아 준 망고주스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영어도 곧 잘하는 젊은 점원은 돈을 벌기 위해 서티모르에서 이주해왔고, 이 식당의 주인은 미국인이라고 했다. 밤에는 영화상영도하고, 매주 목요일마다 살사 파티가 열리니 꼭 오라는 그녀의 말에 앞으로 찬란한 날들을 보내겠구나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런데 그날 이후, 다시는 그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간판도 없고 식당 이름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분명 식당 이름이 모션 Motion이라고 했는데, 가는 길도 기억나지 않았고 그곳 근처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는 답변뿐이었다.



3.


첫날에만 해도 동티모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붕괴된 건물들을 보며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아니면 바닷가에 앉아 현지인들이 물속에서 팔을 휘저으며 맨 손으로 생선을 잡아내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가 거듭될 때마다 나는 마치 모에 흘린 듯이 재밋거리를 찾아냈다. 그러다가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해안가를 따라 있는 산 끝자락 꼭대기의 그리스도 상까지 간 적이 있었다. 사람도 차도 안 다니는 길을 한 시간은 넘게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 기적처럼 사람을 한 명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루마니아 출신의 UN 경찰이었다. 


근무 중이 아닐 때는 UN 차량을 이용할 수 없다며 그 역시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나와 똑같이 땀으로 흠뻑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동티모르에서 2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다음 달에 귀국할 예정이라 가족에게 보여줄 사진과 비디오를 찍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도 내가 반가웠는지 그동안 잔뜩 쌓인 이야기보따리를 한 번에 풀어놓느라 입이 쉴 새가 없었. 루마니아에서 경찰을 하다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UN에 지원하게 된 일, 그리고 오로지 UN에 지원하기 위해 영어를 독학으로 습득한 일, UN 임무를 수행할 나라들로 제안받았던 곳 중 동티모르가 가장 안전해 보여 선택했다는 사정, 그리고 루마니아에서 아내, 아이들과 함께 살 집을 직접 설계하며 지루하고 긴 2년을 버텼다는 것. 자신의 말만 하는 것이 멋쩍었는지 그 끝에 그는 내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것도 아주 황당한.


“동티모르 대통령을 만나 본 적 있어요?


딜리에는 대통령조차도 마땅히 갈 곳이 별로 없어 UN 직원들이 많이 다니는 바닷가 식당 같은 데서 자주 목격이 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특히 외국인들과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니 잘 찾아보라며 신신당부했다.

그 말은 ‘탐험가’ 신분인 내게 마치 보물찾기 미션처럼 들렸다.



동티모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편안하게 대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보면 UN에서 일하는 사람이려니 하며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내가 카메라를 켤 때면 그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사진을 찍어 달라며 내 뒤꽁무니에 줄을 서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과 아주 어르신들도 사진에 찍히고 싶어 나를 불러댔다. 그 사진을 현상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어서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아마도 내가 그들이 말하는 ‘뉴스 리포터’인 줄 알고, 세상 어디가 되었건 자신의 얼굴이 TV에 나왔으면 하는 바람 에서였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하는 우리네 동요처럼 말이다.

손주를 보던 늙은 할아버지는 없는 손짓으로 내게 이리 오라는 시늉을 하며 ‘그냥 가지 말고 나랑 내 손주도 좀 찍어가이런 식이었고, 한 아주머니는 ‘시간 없으니 빨리 찍어요, 빨리’하며 나를 불러 세우고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가다듬으며 포즈를 잡았다.

그러면 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뉴스 리포터인 척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4.


“그래도 모기에 물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요”


이곳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무엇에 물렸는지 빨갛게 부어오른 내 왼쪽 눈을 본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거미에 물린 것 같다며 건넨 말이다. 그는 모기가 옮긴 뎅기열에 두 번이나 걸려 죽을 뻔 한 일화도 털어놓았다. 열대 기후인 데다 뎅기열과 말라리아에 걸리기 쉬운 이곳에서는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면 밤낮으로 노력이 필요했다. 밤에는 숙소에서 더위와 모기퇴치 목적으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뭐에 물리는 일은 없었지만, 다음날 일어나면 눈과 얼굴이 탱탱 부어 있었다. 햇빛이 쨍한 낮에도 길거리에 모기가 날아다녀 하루의 가장 첫 일과가 온몸에 모기 퇴치제를 뿌리는 일이었다.  


아무튼 거미에 물려 다행이었지만, 경각심이 생겨 모기 퇴치제를 더욱더 꼼꼼히 뿌리며 숙소 주인이 추천해 준 모비스 Maubisse라는 마을에 다녀오려는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때, 전 날 잠깐 본 미국인 제프 할아버지가 조용히 모닝커피를 마시다가 말을 걸어왔다.


“좋은데 가요? 나도 좀 데려가요”


혹시 거절당할 것에 대비한 듯 농담 어조로 물어본 물음에 내가 선뜻 “그래요, 같이 가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던 사람처럼 그제야 이미 빨갛게 타 버린 콧잔등에 선크림을 덧 바르며 서둘렀다.

처음에는 젊은 나에게 의지해서 편하게 구경이나 하려는 생각인가 했는데, 이런 섣부른 판단과 달리 제프 할아버지는 호기심이 많았고, 길을 찾는데도 열정이 넘치셨다. 손바닥 만한 카메라로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심히 찍으면서도 발걸음은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숙소 주인이 알려준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어떠한 건물도, 매표소도, 표지판도 없는 일반 길과 달라 보일 것 없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고, 아이스크림과 과일 장사꾼들이 다니는 것이 보통 터미널의 분위기와 얼추 비슷했다. 모비스에 가는 버스에 대해 현지인들에게 물으니, ‘아마도’ 곧 올 거라는 대답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이제 할 일은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랬다, 동티모르에서는 시계가 필요 없었다. 어차피 정해진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제프 할아버지와 카메라를 연신 눌러 댔다. 시간은 계속 흘러 더 많은 사람들이 왔고, 더 많은 아이스크림 장사꾼들이 보였다. 한국돈으로 100원을 주고 사 먹은 오렌지 아이스바는 단 맛보다 물 맛이 더 진하게 났다. 장사꾼들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시장이 형성되었다. 장사꾼들은 돗자리를 펴고 각자 가져온 물건들을 산더미만큼 쌓아 놓았다.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오이 등 가짓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런데 반해 손님이라 할 만한 사람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두 시간이 흘렀다.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장사꾼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가 하면, 아예 드러눕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운 좋게 버스가 나타나서 떠난 이들 빼고는 그늘 밑에 자리 잡고 웅크리고 앉아 졸지도 못하고 버스가 오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사람들에게 다가가 버스가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안 오는 게 맞는지 물었다. 대부분은 모른다고 했고, 곧 올 것이라고 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무관심한 어투로 툭 내던진 한 마디가 들려왔다.


“이상하네요. 그럼 아마 세 시간 전에 떠났나 보죠”




숙소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리는데, 어디서 닭싸움이 열릴 참인지 닭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안은 남자 두 명과 여러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튼실해 보이는 닭들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고 주인들의 눈빛에서는 비장함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닭싸움을 직접 보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안고 무리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바리케이드가 쳐 있는 닭싸움 장. 나와 제프 할아버지가 동시에 카메라를 꺼내 들자, 우리를 뉴스 리포터인 줄 착각했는지 한 남자가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가까이에서 관전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줬다.


주인들이 각자의 닭을 땅에 내려놓자마자 파드닥하는 날개 짓 소리와 함께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바리케이드 밖에서는 구경꾼들이 흥분된 톤으로 소리를 질렀고, 그 안에서는 두세 명의 남자들이 구경꾼들이 건네는 돈을 받아 챙기느라 분주했다.


둘 중 하얀 닭이 일방적으로 목 부위에 공격을 받아 뒷걸음질을 치더니, 다리가 접히며 주저앉았다. 주인은 그런 닭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고,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닭은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눈 깜빡할 사이에 미동마저 사라졌다.


승자는 웃음꽃이 활짝 핀 주인의 품에 다시 고이 안겨 돌아갔고, 패자는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죽어갔다.


카메라를 들었던 손은 서서히 내려왔고, 나와 제프 할아버지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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