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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Nov 04. 2021

해발고도 2800미터에서 쫓겨난 행운.

864일간의 세계일주 - China

북경에서 티벳의 수도인 라싸를 잇는 하늘길을 달리는 열차. 최고 해발고도 5천 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찻길. 창 밖으로 히말라야 산맥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풍경이 펼쳐진다는 칭짱열차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면 나는 티벳에 가는 상상에 빠졌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바로 그 열차를 타러 가는 날이었다.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은 저녁 여덟 시, 심장이 설렘을 못 이기고 하루 종일 제멋대로 뛰어 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목 시계를 연신 봐대고, 북경에서 며칠간 묵었던 호스텔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련한 말솜씨와 영어실력으로 세계 각 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각양각색의 대화를 이끌어가던 호스텔 직원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미지근한 맥주에 얼음을 넣어줬을 땐 충격이었지만,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호스텔에서는 간단한 음식과 음료, 술도 팔았다)

전 날 약국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사전을 봐가며 구입한 고산병 약을 꺼내기 쉬운 보조가방에 넣으며,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총알을 챙기는 용사처럼 비장한 마음을 굳혔다. 오늘은 오랫동안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날.


퇴근시간의 북경은 아수라장이었다. 눈에 밟히는 게 죄다 택시인데 그 뒤 좌석에는 꼭 사람 한 명이 타 있었다. 정류장에 연달아 오는 버스는 승객들 몇 명을 튕겨내고 나서야 간신히 문을 닫고 출발했다. 이 와중에 큰 배낭과 작은 배낭을 앞 뒤로 매고 버스에 오르려니 미안함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푹 숙였다. 게다가 버스가 설 때마다 출입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 배낭은 여간 거슬리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 편으로 너무 신이나, 유치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국어로 작은 팻말이라도 준비해 올 걸. ‘정말 미안하지만 저는 지금 꿈을 향해 가는 길이랍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퇴근 발길이 만들어낸 뿌연 먼지는 어둠에 가려졌고, 눈부시게 환한 조명의 북경 서역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은 꿈의 출발지로서 충분히 화려해 보였다. 이렇게 멋진 날, 배웅해 주는 이 한 명 없다는 것이 조금 씁쓸했지만 한편으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벅차오르는 감정이 온전히 내 것이라는 사실이 짜릿했다. 꿈의 기차를 탈 북경 서역 안, 대기실에 앉아 기차 안에서 먹으려고 산 주전부리들을 보며 다시 한번 행복했다.

그리고 곧 40시간이 넘는 기차여행이 시작되었다.


내 자리는 정확하게 90도 각도의 등받이가 붙은 ‘잉줘’, 칭짱열차에서 가장 낮은 3등급 좌석이었다. 침대 석인 ‘잉워’와, 문이 있어 프라이버시까지 보장되는 ‘란워’라는 등급의 좌석도 있었지만, 왠지 배낭여행의 컨셉에 맞추려면 가장 싼 것을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좌석의 등급 따위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잉줘’ 석의 불편함은 등받이가 끝이 아니었다. 의자 폭이 좁아 아무리 날씬한 사람도 옆 사람과 어깨를 맞붙일 수밖에 없었고, 마주 보는 좌석과의 거리 또한 무척 짧아 상대방과 발도 맞붙여야 했다. 의자는 3-2열로 나열되어 있는데 하필 나는 3열 좌석에 당첨되었지만, 창문 석이라 그나마 운이 좋았다. 오른편에 앉은 옆 사람도 둘 다 날씬해서 다행히 어깨가 겹칠 일 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가장 큰 문제는 등받이가 맞았다. 동일한 등받이에 뒷사람과 등을 맞대고 세상 불편한 90도를 유지하며 앉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함을 호소하는 서로의 뒤척임이 몸 깊숙한 곳까지 전해져 왔다.


나와 마주 보고 앉은 승객은 북경에서 유학을 하는 티벳 학생들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가는지 나만큼 신이 나 보였다. 이들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며 해바라기씨를 까먹었다. 과자와 장아찌 같은 것도 까먹었다. 그렇게 한 참을 먹고 떠들다가 쓰레기가 수북하게 쌓인 테이블에 어느새 머리를 박고 잠에 들었다. 나 또한 편한 잠자리 자세를 찾기 위해 창가에도 기댔다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푹 숙여 보기도 했지만, 결국엔 티베트 학생들의 자세가 잠자기에는 최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내 좌석과 멀지 않은 곳에는 나보다 두 살 어린 한국인 J가 타고 있었다. 중국에 도착했을 때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와 대화를 하다가 같은 날, 같은 열차 티켓을 구매한 걸 알게 되었다. 가고자 하는 곳도 같았지만 각자의 여행 계획을 존중하느라 북경에 있는 동안 따로 지냈는데, 기차에서 다시 만났다. J도 나처럼 가방에 주전부리를 잔뜩 사 와서, 기차의 맨 뒷 칸 바닥에 앉아 함께 나눠 먹으며 지난번에 봤을 때 보다 더 친해졌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중국-티벳-네팔-인도를 6개월 동안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인도까지는 나와 계획이 같은 것도 참 신기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꺼낼 때면 '너는 참 특이한 아이야'라는 반응이 돌아왔는데,  여행길에 오르자마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다니.




기차가 출발한 지 열여섯 시간이 지나 기차는 란저우 역에 정차했고, 그곳에서 내 옆에 앉았던 중국인 커플과 작별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이 두 사람 덕분에 앞에 앉은 티벳 학생들과 대화할 수 있어 좋았는데. 그 둘이 떠난 자리엔 중국인 아주머니 두 명이 탔다. 기차가 다시 출발하고, 이 중 한 명은 내가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내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면 '아유, 벌써 왔네'하는 듯한 말과 표정을 하며 발을 내렸다. 그 모습이 얄미웠지만, 기차가 달릴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화장실에 자주 가야만 했다.


기차가 출발한 지 스물다섯 시간 후, 드디어 우려하던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다. 고산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예전에 페루의 쿠스코에서 된통 당해본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차를 타던 날 충분히 휴식도 취하고, 약도 먹고, 물도 많이 마셨는데. 떠나는 날 심장이 곤두박질쳤던 건 설렘 이 아니라,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걸까.

결국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머릿속이 윙 하는 소리로 가득 차더니, 희미하게 티벳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드는 것도 느껴졌다. 가까스로 눈을 뜨니 옆에 앉았던 티벳 아주머니들의 걱정 어린 얼굴이 잠깐 보였다. 그 둘은 의자를 비워 나를 그 자리에 눕혔다. 윙 소리가 사라졌다. 여러 얼굴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관장에게 말했고, 곧 결정이 내려질 거예요"

처음 듣는 목소리의 여자가 영어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결정이라니, 무슨 결정, 이해하지 못했지만 되물을 힘이 없었다.

 

얼마 후, 열차를 담당하는 기관장이 나타났다. 기찻길의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으니 다음 역에서 나를 기차 밖으로 안전하게(?) 하차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북경과 티벳 중간쯤 되려나, 도대체 어딘데 내리라는거지. 기차는 해발 3천 미터 고도에 닿으면 자동으로 기내에 산소공급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기차에 남게 해달라고 애걸했지만 소용없었다.


해발 2천800미터 꺼얼무 역에 하차한 시간은 새벽 다섯 시.

돈 아끼려고 3등석 표를 산 죄, 많이 먹은 죄, 옆에 아주머니가 내 의자에 발 올렸다고 혼자 화를 내고 열을 올린 죄,  그리고 아픈 내가 혼자 하차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함께 기차에서 내린 J는, 나랑 조금 더 친해진 죄. 나에 대한 원망과, 꿈이 깨졌다는 절망감이 몰아쳤다.


하차한 사람은 우리 둘 말고 두 명이 더 있었다. 고산병 증세를 보인  아내와 그녀의 남편. 50세 정도 돼 보이는 인상이 아주 좋은 부부였다. 하얼빈에서 왔다는 이 부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택시를 타고 어둠을 달려 병원에 도착하여 무사히 첫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밝자, 하얼빈 부부는 다시 우리를 챙기며 택시를 잡아 하룻밤 묵을 만한 호텔을 찾아냈다. 택시비에 병원비까지 내주시더니, 호텔비까지 내주시려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이런 호의가 익숙하지 않은 탓일까, 고마움보다 신세 진다는 마음이 더 앞섰다.

내가 과연 이렇게 마음씨 좋은 부부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나라면, 처음 본 외국인에게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을까.

누군가의 도움을 떳떳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느라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보며, 최소한 나는 이 부부만큼의 마음씨를 갖지 못한 사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도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손을 열심히 흔들며 거절하느라 바빴다.


다음날 이곳을 지나는 칭짱열차를 이어 타려면 혈압과 심전도 측정 결과가 있어야 했기에 호텔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부부와 함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약 값을 내주시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그리고 하얼빈 부부와 함께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 역무원에게 결과를 보여주며 내일 기차에 빈 좌석이 있는지 확인했다.

딱 두 좌석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총 네 명인데.


나만큼 상태가 안 좋으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던 아내분은 이번에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은 심전도 결과가 잘 안 나왔으니, 우리 보고 타고 가라고 하셨다. 그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런 말은 없었는데. 게다가 그다음 날 기차에도 빈 좌석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얼빈, 그 멀리서 설레는 마음으로 열차에 올라 티벳으로 휴가를 떠나는 두 부부의 상황은 따지고 보면 나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기에,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 그렇게 바쁘게 거절하던 나는 부끄럽게도 두 분의 앙보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날 밤 잠에 들기 전, 부부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날 새벽

‘똑 똑’

문 밖에는 잠옷을 입은 아내분이 서 계셨다. 새벽 5시 기차를 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혹시 우리가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할 까 봐 깨우러 오신 것이었다.

낯 선 땅, 꺼얼무, 다시 꿈을 향해 가는 길. 조심히 가라며 배웅해 주는 이가 있었다.


다시 열차에 올랐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 밖으로는 상상했던 장관이 펼쳐졌고 열차 내에는  비행기 내처럼 자동으로 산소가 공급되었다. 해발 4150미터 낙추에서 잠시 정차를 하고, 해발 5천 미터에 달하자 모든 승객에게 별도의 산소공급기까지 제공되었다.

잠시 후, 예정되었던 2박 3일이 아닌 3박 4일에 걸쳐 티벳의 수도 라싸에 도착했다.  


결국엔 이렇게 오기로 되어 있는 것을. 고작 하루 늦게 왔을 뿐인 것을. 이틀을 늦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을. 미리 좌절하고, 절망하고,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부부의 고마운 마음씨를 거절하기에만 바빠 보답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요동쳤다. 하얼빈 부부를 떠올리니,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몰려와 가슴이 또 다시 쿵쾅 거렸다.

나같은 사람이 이런 행운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똑, 똑"

하얼빈 부부였다.

밖에 나가 점심 먹고 오는 길에 우리에게 주려고 국수를 사 왔단다.


북경에서 먹은 음식들은 하나같이 다 입맛에 안 맞아 중국음식은 기억 속에 트라우마처럼 자릴잡으려던 차였다.


그런데 중국 국수가 이렇게 맛있네, 꺼얼무에서 처음으로.


하얼빈 부부는 그렇게 좋게 남을 뻔 한 기억까지도 바꿔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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