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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Oct 12. 2019

사진이 금지된 비밀의 공간. 존 리트블랫 경 갤러리

브리티쉬 라이브러리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


영국의 자랑이자 방대한 양의 지식 서적을 보관하기로 유명한 리티쉬 라이브러리에는 사진도 영상도 허용되지 않는 비밀스런 갤러리 한 곳이 있다.

 

아마 블로그나 인스타 포스팅용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겐 그리 매력적인 여행 장소는 아닐 것이다. 이런 이유에선지 내가 한 시간 반을 맘껏 내부 전시물에 취해있는 동안 마주친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입구부터 엄격하게. 노 포토그래피.

그래서 도대체 이 갤러리엔 무엇이 있느냐고? '보물'들이 있다. 실제로 존 리트블랫 갤러리의 별명은 브리티시 라이브러리의 보물(Treasure)이다.


일단 1215년에 최초로 승인되며 세계 민주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마그나 카르타의 원본이 전시돼 있다. 사본도 아니고 원본. 

 

약 9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 역사적 종이를 마주하는 기분이란 참 묘했다.


관람객들의 예절도 정말 엄격하고 스스로 잘 지켜서, 마그나 카르타 전시실에 들어온 가족 중 아이들이 큰 소리를 내자 부부는 곧바로 아이들에게 "이 방에 있는 전시물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전시물이고 이곳에서는  마그나 카르타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니 조용히 해야 한단다." 라며 아이들을 타일렀다.


마그나 카르타를 위한 전시실은 따로 마련되어 있고 그 외의 전시물 들은 이렇게 큰 전시실에 섹션별로 분류돼있다 [사진=브리티쉬 라이브러리 홈페이지]

마그나 카르타 외에도 문학적 '보물'인 1640년 셰익스피어가 작성한 원고의 원본, 제인 오스틴, 오스카 와일드의 원고 원본 등이 갤러리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필체 하나하나, 펜이 남긴 자취 하나하나를 다 구경해 볼 수 있다.


그림 같은 고상하고 비싼 취미에는 조예가 없는 나지만 유화 전시는 좋아한다. 이유는 단 하나. 화가의 붓터치를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화가가 남긴 붓터치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그 화가와 연결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의 펜이 남긴 자취, 펜터치 하나하나를 따라 볼 수 있는 이 갤러리가 정말 좋았다.


음악 원고 원본들도 있어서 모차르트, 베토벤, 헨델의 자필 원고 악보들부터 비틀즈의 미쉘 원고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음악가들의 고뇌도 엿볼 수 있다. 천재 작곡가라는 그들 역시 원고 한켠에는 수정의 흔적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오디오도 지원해주기 가능하므로 헤드셋을 착용하고 악보를 따라가며 들을 수 있는 즐거움도 체험 가능하다. 나는 악보를 읽을 줄 모르지만 몇백 년이 지나도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마스터피스란 이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영국인 할머니는 헨델의 원본 악보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조용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이 공간이 자신의 피아노 연주장인 것처럼. 


특히 비틀즈의 미쉘은 내게는 좀 더 특별했다. 잠시 토론토에서 생활하던 시절, 내가 사용했던 이름이 미쉘이었다. 그때 나와 친구들은 심심하면 비틀즈의 미쉘을 아무데서나 목놓아 부르며 웃고 떠들곤 했었다. 그때가 생각나 혼자 미쉘을 들으며 얼마나 숨죽여 웃었던지.

 

갤러리의 보물들은 다양해서 한, 중, 일의 도서들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책도 있었는데 내가 한자가 짧아서 읽지를 못했다. 요즘 들어 아무래도 한자공부를 다시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연구 관련 보물들도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7000페이지에 달하는 자필 연구 서적이 그대로 놓여있었고 세계 최초의 여성 프로그래머였던 에이다가 프로그래밍의 원리에 대해 토론하고 상의했던 내용의 자필 편지도 전시돼있다.


고지도 역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일본이 만든 고지도에는 동해에 한자로 조선해(朝鮮海)라고 똑똑히 명시돼있었다. 내가 한자가 짧아도 이 정도는 확실히 읽을 수 있다. 과거에는 스스로 조선해라고 인정해놓고 식민지배 후엔 일본해로 동해의 이름을 바꿔치기 해버렸다니. 솔직히 이건 비겁하다. 이때는 사진이라도 찍어서 증거물로 남기고 싶었지만 이미 다른 히잡 언니가 사진 찍다가 관리자에게 제지당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질서에 대한 약속은 약속이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일본이 발행했던 지도에 인도 위쪽 네팔 부근을 소인국(小人國)이라고 적은 것이었다. 걸리버 여행기도 아니고 소인국이라니. 왜 그 부근을 소인국이라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만약 방문한다면 내가 추천하는 것은 노트와 볼펜을 꼭 챙겨가라는 것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기억에만 의존하기에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내가 정말로 노트와 펜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 포스트를 쓰면서도, 지금 이 글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한탄하고 있다. 마치 정말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를 다녀왔는데 사진도 없고 돌 한 조각 주워오지 못해서 갑갑한 탐험자의 심정이다. 엘도라도라도 훔쳐보고 온 기분.




하나 더 볼거리

갤러리의 출구로 나와 왼쪽을 보면 벽에 A부터 Z까지 각 국가별로 우표가 정리되어 있다. C나 K섹션에 가면 한국의 옛 우표들을 구경할 수 있다. 무려 화폐단위가 환 때부터 발행된 나이 많은 우표들이다.


외국인은 브리티시 라이브러리의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 오직 영국인만 가능하다. 그러니 이왕 간 것 라이브러리 곳곳에 숨겨진 보물들을 탐닉하고 오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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