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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Sep 29. 2019

베를린에서 한국을 느끼고 싶다면

한식집 얘기 아님

이 날은 베를린 개선문을 찍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로 향하는 길이었다. 구글맵을 통해 쉽게 갈 수 있었지만 도시 자체가 역사라는 베를린이기에 일부러 구글맵을 거절한 채 거리거리를 따라 돌고 돌아 걷는 법을 택했다.


베를린 개선문 근처에서 잠시 기념품 샵에 들러 12유로에 3개 하는 기념 자석을 샀는데 10유로를 먼저 내고 동전지갑에서 2유로를 뒤적이니까 아저씨가 그냥 가란다. "하지만 12유로잖아"하니까 "괜찮아 그냥 가"한다. 2유로를 굳힌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통일정


구글맵을 보고 걸어도 길을 잃는 내가 구글맵도 안 보고 초행길을 걸으니 당연히 길을 잃을 수밖에. 그런데 내 눈에 저 멀리서 한국적 건축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주변엔 사람 하나 없고 온통 비둘기에 둘러싸인 한국 정자처럼 생긴 건물. 블로그에 '베를린 가볼만한 곳'을 검색했을 때 보던 건물은 아닌 것 같은데 한국 전통 건물인 것 같아서 가까이 가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역시나 한국 정자가  맞았다. 이름은 통일정. 후에 알아보니 2015년 한국 통일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베를린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국에서 직접 목재를 공수해와 창덕궁 낙선재의 상량 전을 그대로 본떠 완성한 진짜 우리 스타일의 정자다.


통일정 옆에는 베를린 장벽의 조각들(이라기보단 덩어리에 가깝지만)도 있었다.

역시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가져다 둔 것이라고 한다.

한국 어느 단체에서 단체관광을 다녀갔는지 이름을 적어두고 갔다.

아쉬운 점이라면 홍보의 부족인지, 우리 국민들의 관심의 부족인지 내가 통일정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인도 독일인도 베를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도 단 1명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내가 통일정에 다가갈 때 독일인 두 명이 근처에 서있었는데 베를린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느라 잠시 통일정의 그늘에 머물렀을 뿐, 금방 자리를 떴다.



체크포인트찰리 박물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나누던 구역 '체크포인트찰리' 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 1960년대 70년대에는 베를린을 백림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동백림 서백림. 귀여운 이름.


다시 체크포인트찰리로 돌아와서. 체크포인트찰리 옆에는 체크포인트찰리 박물관이 있다. 학생 할인이 있는데 졸업한 지 3년이 넘었지만 당당하게 대학교 때 학생증으로 할인을 받고 학생용 표를 끊었다. 그런데 입장을 하려는데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남자가 독일어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내 표를 가져가려 시늉하는 게 아닌가. 옆의 매표원도 그냥 가만히 있고, 그 남자가 딱히 악의는 없어 보여서 내가 웃으며 영어로 "하지만 이건 내 표인데?" 하며 표를 주지 않으니까 매표원이 "이 남자는 그냥 당신 대신 개찰구에 표를 넣어주고 싶은 거예요" 하며 부탁한다는 표정으로 윙크를 한다. 나는 그녀 말을 믿고 남자에게 표를 내주었고 남자는 신이 난 표정으로 개찰구에 내 표를 넣어주었다. 문을 열어주는 에스코트까지 해주며. 아마 약간 지능에 장애가 있는 분이 박물관에 놀러 와서 소소한 즐거움을 얻어가는 것 같았다.


체크포인트찰리 박물관에는 소련 공산당의 지배를 받았던 동독사람들의 항거의 역사와, 서독으로의 탈출의 역사와 독일 통일의 역사 외에도 헝가리,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일어난 반소련 항거사 등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맨 꼭대기 층에는 북한의 인권유린 실태에 대한 전시가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전시. 정치범 수용소의 위치도 정확히 표기되어 있다. (곁다리로, 동해East sea와 독도 Dokdo까지 정확하게)



오길남 박사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의 이야기. 1985년 (독일 통일 전)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과정 유학 중이던 오길남 박사는 간호사였던 신숙자 씨를 만나 결혼했고 오혜원, 오규원이라는 두 딸을 낳았다.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그에게 명망 있는 남한 사람이 접근해(이 부분은 여전히 논란이 있는 부분이라 이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오길남 박사의 경제학 지식이 남북관계에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북한으로 넘어오라고 했다.


젊은 지식인의 심장은 뜨거웠고 오길남 박사는 가족들과 함께 북한행을 택했다. 그처럼 지식인이었던 아내 신숙자 씨는 오길남 박사에게 "분명 후회할 것"이라 경고했지만 남편의 뜻을 따랐다고 한다. 역시 아내의 말처럼 오길남 박사가 북한에 속았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오길남 박사를 경제연구소 등 유관단체에 배치하는 대신 그에게 공작원 교육을 시켜 학자였던 그를 공작원으로 양성하길 원했던 것이다.


오길남 박사는 가족들과 수차례 탈출을 계획했으나 북한의 감시도 그만큼 강력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오길남 박사의 아내 신숙자 씨가 말했단다. "당신이라도 가세요" 여기서 또 내 가슴이 미어진다. 한국 아내들의, 어머니들의, 여자들의 그 희생정신. 그렇게 오길남 박사는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에 자수했고 그 길로 신숙자 씨와 두 딸은 북한 정부에 의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생사를 모른다.

UN이 중재에 나선적이 있으나 북한의 반응은 언제나 그랬듯 냉랭하다.


https://www.yna.co.kr/view/AKR20161110158200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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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시작한 글이 무겁게 끝나버린 기분이다. 사실 독일에서도 '통일'은 젊은이들에게 한물간 소재고 한국에서도 '통일'은 인권 또는 현실적 접근보다는 정치적 접근이 더 익숙한 소재가 돼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독일 통일은 당시 독일 정치가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왔으며 굶주리고 체제에 화가 난 동독 주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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