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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Nov 03. 2019

그냥 한번 풀어보는 91년생 나의 2010년 수능 썰

곁다리로 한국 교육도 좀 까고


내가 수능을 친지는 이미 10년 전의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능은 참 무서운 시험이다. 고작 열아홉 살짜리 어린 청소년들에게 단 하루의 시간 동안 약 10년간의 성취를 증명하라니.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수능 보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내가 거창한 수능 거부자였다는 것은 아니다. 수능 대신 수시 몰빵을 택한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수시 원서 접수 제한이 없었지만 나는 딱 다섯 군데만 넣었다. 주변에는 수시 원서 값으로 백만 원에 가까운 돈을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다음 해인가 다음다음 해인가 교육부는 지나친 수시 과열과 돈 낭비를 막겠다며 '수시 원서 다섯 개 제한'을 걸었다. 나는 이 제한도 바보 같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다섯 개 제한이 생겨서 세 개만 쓰고 싶은 학생도 아까워서 다섯 개를 채워서 원서 접수를 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하거니와, 어쨌든 수시 원서를 백 개를 넣건 천 개를 넣건 그것도 학생과 부모의 선택인데 그것을 왜 교육부에서 제한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다섯 군데 원서를 냈고 두 군데에 서류 합격을 했다. 서류 합격을 하고 시험과 면접을 모두 마친 게 당해연도 10월 말쯤 됐다. 그 해 수능은 11월 12일이었고 나는 10월 말부터 모든 공부에서 손을 뗐다. 어차피 나는 수시 합격이 아니면 재수할 거니까. 최종 합격만 하면 최저등급도 없는 전형이었다.


그때 신종플루가 유행을 했는데 내 짝꿍이 마침 신종플루 양성이 나왔다. 학교에 있는 게 너무 지겨웠던 나는 짝꿍 책상에 온 몸을 문대며 신종플루에 감염되기 위해 용을 썼다. 물론 학교 나오기 싫어서 그러는 나의 심보를 플루 바이러스도 알아챘는지 감염되지 않아서 출석일수를 꽉 채워야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11월 초 수능 전에 두 군데 대학 중 한 곳의 최종 합격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11월 4일이었나. 나는 당연히 합격하리라 생각했다. 그 대학교 그 특별전형의 경쟁률이 무려 1:1.495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락했다. 내가 0.495였던 것이다. 여기는 시험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대학교 합격 발표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대학교 시험 때는 시험도, 면접도 못 봤다고 생각해서 오전 시험 마치고 오후 면접 안 보고 집에 갈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니 더더욱 인생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험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학생들, 수능 끝나고 자살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나는 정말로 이해한다.


첫 번째 대학을 떨어져서 슬픈 데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등장하는 도곡동 김영모 빵집. 얼마 전에 도곡동 갔다가 보이길래 그때가 생각나서 찍었다.


갑자기 김영모 빵집이 등장하는 이유는 내가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방 출신이고, 우리 집엔 서울에서 대학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특히 첫 번째 대학 같은 경우는 마치 '우리의 소원은 통일'처럼 내가 고등학교 3년 내내 우리 집에서 노래를 부르며 내가 꼭 합격하길 바라던 곳이었다. 그래서 면접 전에 아버지는 누구에게 '속아' 강남 도곡동에 위치한 면접 족집개 과외를 알아오셨고 2009년 당시 나는 90분에 20만 원, 총 40만 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화학과 생물 시험 면접 과외를 받았다. 그때 또 선생님 만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고 아빠는 김영모 빵집에서 마들렌을 내게 사서 들려 보냈다. 가격 참 비싸더라. 역시 당시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은 '무슨 빵이 이렇게 비싸노'였다. (나는 경상도 출신이 아닌데 아버지가 경상도 분이라서 가끔 충청도와 경상도 방언을 섞어서 생각한다.) 내가 앞서서 아빠가 속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막상 시험 면접을 들어가니, 시험 문제는 수학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 기억에 그나마 수학 중에 내가 좋아하는 확률이었고 예제가 야구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첫 번째 문제는 정확하게 풀었다고 면접관 교수님들도 인정해주셨다. 그런데 아마 두 번째 문제를 정확하게 풀지 못한 게 패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방공립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과 낮은 학교 성적도.


11월 4일 이후로 우리 집은 초상집이 되었고 나는 나도 우울해 죽겠는데 부모님 눈치 보느라 사실 11월 7일까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뭘 어떻게 살았고 먹었고 잤는지. 그리고 11월 7일에 놀랍게도, 두 번째 대학교가 나를 살려줬다. 그때 나는 집에서 결과를 확인하고 소리를 꽤액 질렀다. 아아, 나는 살았다.



2009년 11월 12일 대망의 수능날


그래도 학교 전체 수능 평균 성적은 중요하니, 수능은 너무 망치지 말고 오거라.


모 선생님의 특별 부탁이었다. 나는 애초에 수능장에 가지 않으려 했으므로 귓등으로 들었다. 하지만 또 아버지가 문제였다. 아버지는 수능 당일에 나를 포함하여 시험장이 같은 다른 아이들의 카풀을 제안하셨고 카풀자의 딸내미인 내가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수능시험장에 갔다.


막상 가서 앉아있으니까 다 찍고 자기에는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 최대한 빨리 풀었다. 이제는 시험시간도 다 가물가물하지만 언어영역은 20분 남기고 다 풀고 잤다. 수리도 다 풀고 주관식은 다 찍고 시계를 보니 40분이 남았길래 잤다. 내가 계속 자니까 다른 학교 학생들이 나를 막장 취급하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꿋꿋하게 잤다.


대망의 점심시간. 어머니는 평소 속이 좋지 않은 날 위해 새우죽을 끓여주셨는데 간을 안 보신 건지 짜서 먹을 수가 없었다. 엄마 바쁘니까 그냥 김밥천국 가서 김밥 사간다던 내 말대로 그냥 김밥 사가게 해 주시지 이건 먹을 수가 없었다. 먹는다 치더라도 짠맛을 중화시키느라 물을 들이켜면 시험 보다가 오줌이 마려울 것 같아서 그냥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같이 도시락 먹으러 온 친구들의 밥을 얻어먹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안하다.


밥을 먹고 나니 졸음이 밀려왔다. 일단 외국어영역 듣기 평가는 다 듣고 풀고 한숨 잤다. 일어나서 남은 시간대로 문제를 푸는데 졸려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또 한 장, 즉 두 페이지를 다 찍고 그렇게 마킹을 마친 뒤 또 잤다. 외국어 영역 시험 때는 내가 하도 자다 깨다 풀다 자다 하니까 중간에 깨운 선생님도 계셨는데 어쨌든 오엠알 정답지에 마크는 다 돼있으니 그냥 지나가셨다. 이 분은 공교롭게도 내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이셨다. 나는 기억하는데 선생님도 기억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드디어 마지막 과학탐구 시간이 왔다. 과탐은 예전부터 빨리 풀어왔던 과목이기에 일단 화생지는 빨리 풀었고 생물2는 진짜 한 번호로 쭉 밀어봤다. 4번이었나 2번이었나 그때만 해도 탐구영역은 한 번호로 쭉 밀면 4개 맞는다고 했는데 진짜 나중에 채점해보니까 4개 맞았고, 신기한 건 9등급이 안 나왔다.


 


학자금 대출. 수능 안 봤으면 대학 못 갈뻔했다.


나는 등록금과 학자금이라는 복병이 있다는 걸 생각도 못했다. 대학 합격 그것도 나름 명문대 합격이라는 게 너무 달콤했으니까. 그런데 부모님이 불러서 나에게 은행에 가서 학자금 대출을 신청하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알고 봤더니, 수능 성적도 일정 성적 이상이 안되면 학자금 대출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내가 진짜 수능을 안 봤거나 오엠알 카드 중복 마킹으로 올 9등급을 받았다면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갈 뻔했다.


어휴 캠퍼스의 낭만도 못 즐겨볼 뻔했네



3/4(혹은 5)/4


과탐은 기억이 안 나고 그렇게 자면서 수능을 쳤는데 언수외 3/4(5?)/4가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평소 모의고사 성적에 비하면 당연히 낮게 나온 점수다. 그런데 내 친구가 언어영역을 그렇게 잘하던 친구였는데 수능날이라서 긴장을 너무 했던 탓인지 시간 꽉 채워 열심히 쳤는데 훅 미끄러졌다. 언어 5등급이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 친구한테 너무 미안했다. 솔직히 등급 뺐은 거 아니야. 하지만 내가 또 너무 밑을 깔았다면 학자금 대출을 못 받아서 대학을 못 갈뻔했다.



수능, 수시, 정시


그래서 나는 수능이라는 제도가 참 아리까리~하다. 하루 만에 정말 모든 걸 판가름 낼 수 있을까. 그 하루에 아프거나 긴장을 너무 한다거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라고. 물론 일 년에 수능을 두 번 시행했어도 성적은 비슷했다는 통계 결과가 있긴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수시라는 제도에 그렇게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지나치게 수시 쏠림이나 정시 쏠림으로 입학 비율이 치우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학생에게는 잠재력이 있으니까. 그리고 꼭 대학을 나와야만 잘 사는 것도 아니니까. 나 같은 경우에도 종종 대학을 안 가고 일을 일찍 시작했다거나 아니면 좀 늦게 세상을 배우고 대학을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나이 문화가 있고 대학 나와야 좀 사람 취급해주는 문화가 아직 팽배했으니 그랬으면 그 나름대로 또 후회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갔고, 무지무지하게 많은 에피소드를 안고 졸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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