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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Nov 09. 2019

프리홍콩 하다가 중국인 친구들한테 의절당했다.

잘들가, 그래도 추억은 간직할게


내가 공부하고 일했던 밴쿠버에는 중국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래서 자연스레 내 주변엔 중국인 친구들도 많았다. 보통 유순했는데 교육의 영향인지 대만이나 홍콩 얘기만 나오면 아주 강경해졌다.


난 대만 애들이 자기들 소개할 때 I'm from Taiwan이라고 말하는 게 너무 싫다. 타이완은 무슨, 중국이지!


라거나,


홍콩도 마찬가지야. 꼭 자기들 소개할 때 중국인 Chinese라고 안 하고 I'm from Hongkong이라고 하는 거 싫어!


라고 무서운 태도로 말하고들 했다.


재미난 추억도 많다. 같이 떡볶이를 먹었다거나, 중국 식당에 가곤 했다. 우리는 가끔씩 일본 친구들을 놀리기도 했다. 뭘 가지고 놀렸겠어. 역사 가지고 놀렸지. 일본의 아시아 침략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일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아시아계 학생들은 위아 더 월드였다. 대만, 중국, 필리핀, 그리고 나 한국까지. 오죽하면 한 번은 교수님께 그 모습을 목격 당해 주의까지 받았을까. 물론 우리가 일본인 학생들을 괴롭힌 것까진 아니었고 진짜 정확하게 사실에 기반해서, "야, 너네가 그랬잖아.", "진짜야. 너네만 모르는 거야" 정도. 그러면 일본인 학생들은 처음엔 당황하다가 나중엔 진짜 몰랐다고 사과했다. 일본 역사 교육의 안타까운 민낯. 우리가 사이가 나쁜것도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이 때 일본인 친구들에게 내가 몰랐던 일본에 대해 많이 배웠다. 아직도 연락하며 지낸다. 

여담으로 당시 유난히 말이 없고 조용한 일본인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가 소위 말하는 일본 극우파였다. 그 학생은 같은 일본인 학생들끼리도 평판이 좋지 않아서 은근히 이지메를 당하고 있었기에 적의 적은 친구라고 나와 친한 일본인 친구가 내게 이를 알려주었다. 나는 진지하게 이를 알려준 일본인 친구를 통해 그 극우 일본인 학생에게 사실에 기반한 토론을 제안했으나 그 학생이 자신의 영어 실력을 핑계로 끝내 수락하질 않았다. 이것도 볼만 했을 텐데. 아무튼 여담은 여기까지 하고.


룸 렌트를 하고 살 때 우리 집주인 할머니는 자신이 홍콩 출신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그녀의 영어 억양은 본토 중국인 억양이었다. 만다린과 칸토니스도 문자만 같고 입으로 말하는 레벨에서는 거의 서로 다르단다. 본토 중국인들은 만다린을 쓰고 홍콩 중국인들은 칸토니스를 쓰기 때문에 둘이 또 영어 억양이 다르다.

마침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 중 홍콩 출신이 있었는데 그녀는 2017년부터 매우 당당하게 "나는 홍콩의 독립을 지지한다!"라고 선언하고 다녔다. 그래서 집주인 할머니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할머니가 매우 겁을 먹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내게


그 동료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너는 절대 동조하면 안 돼. 중국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파룬궁도 절대 하지 마라. 중국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다.

라고 했다. 나는 "내가 한국 국적자고 좀 있으면 여기서 영주권도 받을 건데(당시 나는 영주권을 목표로 캐나다에 체류 중이었고 프로세싱 중이었다.) 중국 정부가 나한테 뭘 하겠어요?" 했지만 할머니는 몇 번이고 내게 당부했다.




2019년. 홍콩인들은 '범죄인송환법' 때문에 일국양제가 흔들린다며 다시 분노를 터뜨렸고 거리로 나왔다. 그 거리에 홍콩에서 PD 생활을 하던 내 홍콩인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한국학 석사를 받고 간 친한파 친구다. 하필 내가 국제부 기자 생활을 청산한 뒤에 터진 일이라 기사 한 토막 써주질 못한다는 게 얼마나 갑갑했는지 모른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부디 다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과 혹여 위험하다 싶으면 한국으로 피신하라는 것뿐. 오면 내가 어떻게든 도피처는 마련해줄 테니.


가만있질 못하는 나는 SNS에 FREE HONGKONG 이미지나 홍콩 시위대가 본토 중국 경찰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사진들, 그리고 유럽 여행 중 내가 목격한 유럽의 FREE HONGKONG 시위대들의 사진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아직 SNS 친구들인 중국인 친구들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그들이라고 내 표현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틀린 소리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얼마 뒤엔가 점점 내 피드에 중국인 친구들의 글이 하나 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굳이 그들의 계정에 들어가서 확인하진 않았지만 확실했다. 친구가 끊겼거나, 차단을 당했거나. 그렇게 나는 의절당한 것이다.




나를 의절한 그들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SNS도 감시당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중국의 사회 구조상 그들의 입장에서 나를 계속 친구로 둔다는 건 하나의 위험 부담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을 위해 내가 먼저 떠나 줬어야 하는 게 맞았을 수도 있다.


어제 우연히 사진첩을 뒤적이다 그들과 찍었던 사진이 튀어나와 잠시 추억에 잠겼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추억만 간직할게. 고마웠다.


그리고 의절당한 김에 이젠 더 눈치 안 보고 외칠 수 있게 됐다.


씨X 홍콩에게 자유를 줘라 줘!


굳이 밝히면 내가 홍콩의 자유를 응원하는 이유는, 국민이 원하면 응당 정부는 응답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사라져 버린 90년대 홍콩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필름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사라졌다고 할 수 없지만 홍콩 반환 후 홍콩 영화만의 그 예술성이 중국 정부의 검열과 대륙에서 유입되는 자본에 의해 휘발되어 버렸다. 나는 그 예술이 너무 그립다. 90년대 생이라서 풍부한 감성으로 함께 숨 쉬어 보지도 못했단 말이야.


나머지는 이 시가 대신 말해줄거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Martin Niemö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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