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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Nov 11. 2019

승리 아버지가 주신 컵


**승리를 옹호하는 의도가 전혀 없는 글임을 밝힙니다. 잘못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2월의 일이다. 승리의 버닝썬 사태가 터졌으나 아직 지금처럼 국민적 지탄의 대상은 아니었던 때. 사태가 이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던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스멀스멀, 아오리 라멘 불매운동이 시작되던 때긴 했으나 생각해보면 아오리 라멘의 대표가 승리였을 뿐 직접적 타격은 가맹점주들이 보는 것 아닌가. (나중에 승리는 아오리 라멘 대표직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가맹점주들은 '승리 라멘집'이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쓴 것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승리 사태가 단톡 방의 여성 비하와 성추문, 그리고 부패한 경찰권력과도 잇닿은 사회적 정치적 문젯거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지만 그때만 해도 세간에 알려진 문제는 폭행과 경찰의 미흡한 대응 그리고 약간 루머 수준의 마약 문제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먹으러 갔다. 아오리 라멘을. 당시 같이 동행과 있던 곳이 홍대였고 원래 가려던 라멘집까지 걸어가기엔 날씨가 너무 매서웠다. 


그리고 들어갈 때 내가 본 간판은 '아오리의 행방불명'이었기에 이 가게가 그 유명한 승리의 아오리 라멘인 줄도 몰랐다. 건물에 들어선 뒤에야 동행한 오빠가 '여기가 승리 가게여'라고 해서 그때야 알았다. 


라멘은 한껏 추위에 한껏 움츠러들었던 나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고 나는 직원들의 응대에도 만족했다. 맛은 내가 원래 미식가가 아니라서 평가할만한 위인이 못된다. 뭐든 다 맛있다 그냥 내 입맛엔. 


다 먹고 계산대에 섰는데 주인아저씨께서 구수한 전라도 토음을 쓰신다. 나는 아직 체크카드로 쓰고 있는 대학교 학생증 카드를 내밀었다. 아저씨는 나의 학생증을 유심히 보셨다. 가끔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같이 간 오빠가 워낙 붙임성이 좋아 아저씨에게 "라멘이 참 맛있었어요"하고 라멘 맛을 칭찬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칭찬에 약간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우리에게 작은 상자 두 개를 내미셨다. 


아, 저기 사실 우리 아들 콘서트 하고 이게 남은 컵인데, 혹시 필요하면 가져들 가시라고...


'우리 아들'? 그랬다. 이 주인아저씨가 승리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세상일 특히 연예계일에 워낙 심드렁한 나라서 아오리 라멘 홍대점의 점주가 승리의 아버지인 것도 나는 몰랐다. 그제야 나는 그가 지었던 부끄러운 표정이 단순히 음식 맛에 대한 칭찬 때문이 아니라 한때는 자신의 자랑이었던 아들이 지금은 전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된 것과 자신조차 몰랐던(어떤 아들이 "아빠! 저희 클럽에서 여자한테 물뽕 맞혀서 강간해요!"라는 소릴 하겠나.) 아들의 지저분한 사생활을 기사로 접하며 느꼈을 씁쓸한 감정의 복합적 표현이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그런 그가 승리의 콘서트 컵을 손님들 모두에게 준 것은 아니었다. 우리 뒤에서 계산한 손님들에겐 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우리에게 고마웠을지도 모르겠다. 아오리 라멘 불매운동도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우리는 와서 조용히 라멘을 먹고 맛마저 칭찬했으니.



그리고 몇 달이 흐른 뒤 승리 사태가 정말 심각해진 뒤에 어느 술자리에서 나는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지기 전에 아오리 라멘에 갔다가 승리 아버지에게 승리 콘서트 컵을 받아온 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돌아온 일행의 대답은 나의 예상 밖이었다. 


그거 여느씨랑 친구한테 재고 처리한 거 아니에요? 킥킥킥


발언자와 함께 그 자리의 모두는 웃음이 터졌다. 나도 분위기를 깨기 싫어 함께 웃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승리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단순히 재고 처리를 위해 아들의 컵을 나와 오빠에게 떠넘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방송에서만 보아도 아들을 참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버지던데, 바리바리 싸들고 있을지언정 일면식 없는 남에게 떠넘기기용으로 뿌릴 인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컵은 내가 잘 쓰고 있다. 나쁜 사람의 나쁜 물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 전해준 사람은 그의 아버지니까. 그의 가족까지 함께 욕할 수는 없으니까. 연좌제로 삼족까지 멸하던 조선시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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