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놈을 성희롱으로 고발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오~ 토론토에서 유학했다고? 내가 토론토 유학생 여자들 어떻게 사는지 잘 알지
크크큭
내가 토론토에서 유학한 이력이 있다고 하자 회사 부장이 대뜸 던진 말. 나를 아래위로 재수 없게 훑어본 건 덤.
부장의 와꾸를 설명하자면 썰면 두 접시는 나올 것 같은 입술, 귀는 돼지 귀, 출렁이는 뱃살을 필두로 한 비곗덩어리 몸뚱이. 아무리 봐줘도 저팔계인데, 저 몸뚱이로 토론토에서 여자를 그리 많이 만나봤단다. 아, 토론토에는 어떻게 갔냐고? 아버지가 부자여서 유학 가서 토론토 대학까지 졸업했단다.
그래도 부장님 말씀이니까 나는 웃으며 듣고 있었지만 사이즈가 나왔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친구라곤 같은 한국인 유학생들만 사귀는 철없는 학생이 딱 그였을 것이다. 해외 대학은 입학은 쉬워도 졸업은 어렵다는데 졸업은 어떻게 했느냐고? 외국 대학에서 돈 있는 아시안끼리 대리출석, 리포트 대필은 조금만 줄 타면 금방 가능하다. (본인 타진요 아님) 토플 점수 사서 대학 입학하는 중국 여자애도 봤고 유학비가 모자라 리포트 대필 아르바이트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만나봤다.
캐나다에서 좋다는 대학 나왔으면 거기서 살지. 당연히 졸업은 했으되 영어도 안되고 실력도 안되고 네트워크도 없으니 영주권 하나 들고 한국 와서 검은 머리 외국인 행세하며 잘난 척하는 것이다.
제일 견디기 힘든 건 점심시간이었다. 내게는 원치 않아도 항상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꼰대들로 구성된 밥 모임이 있었다. 밥 먹을 때 부장을 필두로 무슨 음담패설들을 그렇게 해대는지. 특히 어디 룸에 갔네, 아가씨를 만났네 하는 얘기는 단골이었다. 우스운 건 그 밥 모임에 여자 부장도 있었는데 그 여자 부장도 허세인지 사회생활인지 자기가 진짜 좋아서 그러는 건지 아주 자랑스럽게 룸 얘기를 스스럼없이 해댔다는 것이다. (어디 외국계 큰 회사 다니다가 이직한 부장인데 실력은 하나도 없고 내 생각엔 '센 척'하는 게 너무 좋아서 일부러 더 저런 소리 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이 인간들 때문에 공황장애가 도져서 주중 낮용 약까지 따로 처방받아 먹어야했다.
그런 더러운 소리를 들으며 밥을 넘겨야 하는 것도 기분 뭣 같은데 저팔계 닮은 토론토 부장은 종종 그 자리에서 내게 매우 더러운 눈빛도 보냈다.
그의 역겨운 눈빛은 내가 회사를 다니는 내내 계속됐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의 눈엔 나도 그가 만났던 그 정신 나간 유학생들 중 하나로 보였나 보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내가 토론토에서 가장 싫어했던 유학생이 그와 같은 유학생이었다. 나는 오히려 고학파였다. 차비 아끼려고 걸어다니고, 돈이 없어서 남이 사준 팀홀튼 도너츠로 일주일 식사를 떼운 적도 있다. 한국인 부자 유학생들과 어울릴 돈이 없었기에 내 친구들은 다 캐네디언 아니면 다른 나라 유학생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체류 기간에 비해 영어도 다른 한국인 유학생들에 비해 훨씬 잘했다. 그런데 억울하게 나를 자기처럼 팡팡 놀다온 철없는 부자집 쓰레기 취급하다니.
지금의 나였다면 당장 부장 말을 녹취라도 해서 국가인권위원회로 가져갔을 것이다. HR팀은 이미 힘을 못쓰는 회사였다. 대표님도 아는데 눈감고 있는 회사. 그러나 당시의 나는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시험에서 굉장한 쓴맛을 보고 '될 대로 돼라'는 심정으로 아무 데나 합격하고 연봉 잘 쳐주는 회사로 입사를 했다.
면접을 봤던 본부장님이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는 것도 입사의 큰 이유였다. 진짜 철없는 짓거리였다. 본부장님은 나와 몇몇 다른 신입들을 입사시켜놓고 부장들의 등쌀과 사내정치를 못 이겨 본인이 얼마 뒤 퇴사했다. 신입들은 종종 모여서 "참나, 본부장님이 좋아 보이셔서 회사도 좋은 줄 알고 입사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라고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알고 지내던 다른 회사의 대표님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덕분에 이 뭣 같은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다. HR팀과의 면담을 마치고 나를 또 부른 이가 있었으니 놀랍게도 대표님이었다. 그는 사실 나를 매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당장 이번 달 보너스라도 더 챙겨주겠으니 퇴사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 이 회사의 직원들이 입으로 어떻게 내 귀와 정신을 더럽혀왔는지 다 일러바쳤다. 대표님은 한숨을 푹 쉬더니 자신도 알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든 그들과 담판을 지을 테니 나보고 남으라고 했다. 그리고 대표님은 정말로 그들을 한 명 한 명 다 불러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난 지가 오래였고, 너무 지쳐있었다. 새로운 회사의 대표님도 정말 나를 원하고 계셨다. 그렇게 나는 그 회사를 나왔다.
떠나는 마지막까지 대표님은 자기가 원래 떠난 사람에게 절대 이런 말 하지 않는데, 떠난 뒤에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꼭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 후로 일절 열락하지 않았다. 그냥 다시 그 회사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내겐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그 회사가 있던 근처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여전히 그곳에 회사 명패가 있었다. 문득 대표님 생각이 났다. 그 회사 관계자 중 안부가 궁금한 분은 딱 그분뿐. 제발 여타 부장들은 X졌으면. 아니면 다시 한번만 내게 걸려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