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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Nov 18. 2019

예의 없는 세상, 예의 없는 집주인

그래서 제가 떠날게요.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작년 말 급하게 입국해 출근을 약 열흘 앞두고 딱 하루 만에 서울에서 얻은 자취방. 그리고 걸쭉한 전라도 토음을 쓰는 곤조 있어 보이는 집주인 할머니. 그녀는 입주 날부터 이사하느라 열어둔 방문을 노크도 하지 않고 마구 들락거렸다. 


이건 여기다 놓고, 저건 저기다 놔~ 


내 방 인테리어에 관한 엄청난 참견의 시작. 게다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작된 반말. 워낙 어르신이니 반말은 그러려니 했지만 노크도 없이 방에 마구 들어오는 모습은 '이 방 계약을 딱 1년만 하길 잘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간 줄 알았는데 또다시 이사 중인 방에 노크 없이 찾아온 그녀는 다짜고짜 화를 냈다. 


야 너는 왜 전화를 안 받냐~


이사하느라 휴대폰은 진동모드였고 그녀가 내게 세 번 정도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이유는 그냥 지난달 공과금 얘기하려고.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며 그녀가 남긴 말. 


이제 너는 내 거여~ 


약간 간담이 서늘했지만 그냥... 나이 든 사람 특유의 애정표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사는 건물의 가장 꼭대기층에 살았다. 건물 관리인 이름도 그녀로 되어있었다. 전에 살던 오피스텔엔 관리인이 1층에서 상주하며 호실별로 택배를 받아주었다. 그러면 퇴근하고 이름과 서명을 한 채 택배를 수거해가면 됐다. 그녀가 1층에 상주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대신 무인 택배함이 있었다.

하지만 무인 택배함도 꽉 차 있을 때는 무용지물이었다. 특히 내가 입주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이사를 많이 와서 자리 찾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엔가 택배 아저씨가 무인 택배함에 자리가 없어 건물 앞에 박스를 두고 갔다. 건물 문은 입주 카드 소지자만 열 수 있으니까.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건물문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퇴근하고 박스를 확인하러 갔다. 이럴 수가. 누가 그걸 다 뜯어놨다. 하... 누가 그랬겠어. 집주인이 그랬겠지. 


그 후로도 나는 종종 다 뜯어진 남의 택배 상자를 볼 수 있었다. 누가 그랬겠어. 집주인이 그랬겠지. 


입주 후 두 번째로 월세를 지불하던 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집주인은 내게 문자를 날렸다. 


오늘 월세랑 관리비 입금 날인데, 잊으셨어요? 


와우. 아직 당일인데 당일 오전 12시 땡 하면 보내야 하는 거였나. 하루 이틀 늦은 것도 아닌데. 그녀의 추격에 나는 무서웠다. 


한 번은 일하는데 집주인 번호가 부재중 전화에 남아있다. 무슨 큰일인가 싶어 잠시 나와 화장실에서 전화를 걸어보니 집주인이 내 방에 들어왔었단다. 황당해서 "왜요?"하고 물으니 집주인의 변명은 이랬다. 


건물에 소방 경보음이 울렸는데 어떤 여자가 확 뛰어나가더라고. 근데 내가 눈이 거둬서 잘 못 봐 누군지를. 그래서 내가 올라가 보니까 2층에 네 방이 열려있더라고. 네가 나간 건가 싶어서 내가 들어가 봤지.


흠. 나는 언제나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데. 내 방문이 열려있었을 리는 없다. 그래도 혹 집주인의 말이 맞으니(문이 열려있었다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문단속을 두 번 했다. 그런데 내 옆방 여자도 문단속을 두 번 하더라. 아무래도 소방 경보음 울리니까 발원지 찾겠다고 마스터키로 문 다 열어본 모양. 변명은 '문이 열려있어서 열어봤어~' 그냥 첨부터 사실대로 말씀하셨어도 내가 당황은 했을지언정 화 낼 위인은 아닌데. 


하지만 사실 겁도 났다. 마스터키 소유자인 집주인. 언제고 내 방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아무리 같은 여자끼리라도 내 사생활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불쾌감.


게다가 신축이라고 돈은 비싸게 받아갔으면서 건물 마감은 어떻게 한 건지 들어간 날부터 벽지가 떠있었다. 이건 집주인한테 첫날부터 알려뒀다. 나가는 날 책잡히지 않으려고. 여름에는 환기 좀 시키려고 창문을 열면 어김없이 모기가 내 방에 들어왔다. 모기장을 어떻게 시공한 건지. 그 더운 여름밤에 나는 모기에게 헌혈을 무진 당해야 했다. 아니면 굳이 모기와 사투를 벌여야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집주인에게 말해 모기장 시공이라도 다시 해달라고 할까 했지만 말해봤자 나만 피곤해질 것 같아서 그냥 뒀다.


계약기간 만료도 다가오고 나는 이직을 했다. 회사와 다섯 정거장 이상 기존 집이랑 멀어지지만 나는 이사를 결정했다. 이유가 뭐겠어. 집주인이지. 

문제는 보증금 돌려받기였다. 갑자기 집주인이 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 불안감에 박수라도 보내듯 집주인은 보증금과 관련해서 내 전화도, 문자도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말 동안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때'를 검색하고 월요일 오전에는 '서울시 보증금 지원센터'에 상담전화를 해야 했다. (참고로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때는 대법원에 고발을 할 수 있는데 2주 정도 걸린다. 전액 받을 수는 있다. 그 외 취할 수 있는 법적 조치는 있다. 다만 다 시간이 걸릴 뿐. 서울시에서 지원해주는 청년 전세 보증금은 최대 3000만 원은 안되고, 1인 가구는 아예 지원 안 해주는 제도도 있으니 잘 찾아서 상담해야 한다.)


집주인은 내 전화와 문자는 피하더니 우리 아버지 번호는 모르는 번호니까 받았다가 결국 딱 걸려버렸고 내가 방을 빼는 날 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혹시 몰라서 녹음해놨다. 그러면서 집주인은 그냥 더 살지 왜 나가냐고 역정을 냈다. 하... 살고 싶지 않게 만든 건 당신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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