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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Nov 19. 2019

예의 없는 세상, 예의 없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럴 거면 무기명 자율 투표는 왜 하자고 하셨어요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동해안 가자고 한 사람이 누굽니까?


고등학교 1학년 평화롭던 야간 자율학습 시간을 깨뜨린 학년 부장 선생님의 날카로운 질문. 그때 우리 학교는 1학년 생들을 대상으로 수학여행지 자율투표를 실시했다. 행선지는 제주도, 금강산, 그리고 동해안. 세 곳 중에서 1,2,3순위를 적어내는 형식의 무기명 투표였다. 


짱구를 굴려본 결과 내 결론은 이랬다. 


제주도: 이미 가본 경험이 있다. 이렇게 좋은 여행지를 수학여행으로 간다면 분명히 관광지 몇 곳만 휙휙 지나가고 말 텐데 그건 제주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제주도로 간다면 수학여행비는 비쌀 것이고, 우리 집은 가난하다. 1순위 탈락. 


금강산: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흉흉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당시 유행하던 ASK 영국 국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갔더니 북한 군인이 그 옷을 벗던지 그 국기를 가리던지 하라고 했단다. 나는 말을 안 듣는 성격이다. ASK 옷은 없지만 어떤 경로로든 군인이 누군가 내게 제지를 가한다면 나는 정신 못 차리고 튀어 오를게 분명하다. 뉴스에 나온다. 위험하다.

그리고 기사를 통해 금강산에 김일성, 김정일 찬양 문구를 새겨 넣느라고 자연경관이 많이 훼손돼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한다면 나는 분명 혀를 끌끌 찰 것이다. 이런 날 본 북한 군인은 나를 연행할 것이고. 그럼 또 뉴스에 나온다. 위험하다. 

수학여행비? 제주도보다 비쌀 것이다. 금강산은 무조건 3순위. 


동해안: 동해바다는 아름답다. 비행기를 안타도 되고 버스로만 이동하면 되니 여행비도 저렴할 것이다. 오죽헌도 있고 정동진도 있고 신사임당 언니도 강원도 사람이다. 환선굴이라는 동굴도 있다. 그래, 동해안이다. 나의 1순위는. 


나는 1순위 동해안, 2순위 제주도, 3순위 금강산을 그 자리에서 적어냈다. 급우들은 여고생 특유의 군중심리와 소속감 탓이었는지 여기저기 어디로 투표지를 정했느냐 묻고 다녔다. 나는 누가 물어볼 때마다 


"1순위 동해안, 2순위 제주도, 3순위 금강산!"이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이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모른 채. 


그리고 투표지는 걷혔고, 시간은 한참 흘러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됐다. 드르륵. 교실 앞문이 열렸다. 학년 부장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자 모두 주목.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낸 그는 말을 이었다.


수학여행지 투표 결과가 나왔는데, 전 학년 통틀어서 모든 반이 1 제주, 2 금강산, 3 동해안이 나왔는데 이 반만 유독 1 제주 2 동해안 3 금강산이 나왔습니다.
누가 동해안 가자고 했습니까?


아이들은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나도 예상 못한 대답이 나왔다. 


여느가 그랬대요~ 
여느가 동해안 가자고 했어요.


뭐라고? 진짜 내 말 듣고 너희 1 동해안 2 제주 3 금강산 쓴 거니? 선생님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나를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신학기였기에 우리는 서로를 잘 몰랐다. 


학생 이름이 뭐라고? 왜 동해안을 1순위로 가자고 한 거야?
학교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그제야 아이들은 사태가 의외로 심각함을 느끼고 조용해졌다. 내 이름을 외쳤던 친구들이 내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황당했다. 내가 동해안을 가자고 했던 건 학교에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건데, 다짜고짜 학교에 불만이 있냐고 물어보니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아무튼 그는 남은 시간 동안 왜 제주도를 가야 하는지 왜 동해안은 갈 필요가 없는지 일장연설을 하고 갔다. 그럴 거면 투표지에 동해안은 왜 넣어놓은 것인가. 게다가 이렇게 발본색원할 거였으면 무기명 투표는 왜 했나. 무기력한 고1의 아픈 추억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배웠다. 내가 무심코 뱉은 말이 남들에게 진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 다음부터는 말조심하려고 노력을 더 하는 인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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