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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Nov 22. 2019

[프리홍콩]작은 어촌에서 자유의 격전지로, 홍콩의 역사

FREE HONGKONG


 들어가기 전에- 이 글에서 '홍콩'은 '홍콩 특별 행정구'로써 홍콩 섬과 구룡반도 지역, 신계 지역을 합친 범위를 의미합니다.


홍콩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한 중국 공산군. 한 학생이 용감하게 최루탄을 다시 던져내고 있다. [출처 = CBS 뉴스]


 지금 이 순간에도 홍콩의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출처 = canada.ca]


 아시아 최대 자유 항이자 아시아의 진주라 불리던 홍콩은 어쩌다 이지경이 된 것일까. 그리고 왜 홍콩 사람들은 투쟁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홍콩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식민지, 영국령 홍콩

  사실 홍콩은 총인구 3,000여 명 남짓한 작은 시골 어촌이었다. 1841년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을 승리하며 홍콩을 할양받긴 했지만 받고 나서 '아뿔싸'했을 것이다. 그래도 광저우와 가깝다는 점과 수심이 깊다는 점을 높게 사 같은 해 '자유항'을 선포했지만 1844년 로버트 마틴 홍콩 재무장관은 아예 홍콩섬을 포기하자는 보고서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철도 개통과 높은 수준의 행정 시스템 도입, 교육 실시로 인해 홍콩은 빠르게 탈바꿈한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문화까지 완벽히 흡수하며 '아시아의 진주'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왼 - 1880년대 홍콩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 오 - 1880년대 조선의 모습. 출처 = LIFE지


 두 사진이 동일 시대의 사진이라면 믿겠는가. 우리 조상님들 위정자 잘못 만나 참 고생 많이 했다. 


 홍콩의 인구는 190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중국이 신해혁명, 만주사변 등 전쟁과 혼란을 겪는 동안 수많은 본토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몰려와 1931년 홍콩의 인구는 150만 명에 육박했다. 1841년 인구 3천여 명에 불과하던 어촌 마을이 인구 150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도시가 된 것이다. 


 본토 중국인이라는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홍콩은 더욱 발전했다. 


일본의 식민지배 

 그러나 대동아시아 전쟁을 벌인 일본의 침략 야욕은 홍콩을 가만두지 않았다. 1941년 12월 일본은 홍콩을 침략했고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 일본은 홍콩을 먹어치운다. 일본 치하 홍콩은 빠르게 무너졌고 홍콩 시민들은 홍콩을 떠나야 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1945년 전까지 3년 동안 홍콩의 인구는 100만이나 줄어든 60만 명선으로 무너졌다. 


다시 영국령 홍콩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는 영국이 돌아왔다. 1946년 본토 중국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터졌고 전세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다. 국민당은 대만으로 물러났으나 많은 이들이 전란을 피해,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또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영국은 긴장했다. 기세 등등한 마오쩌둥이 언제 홍콩을 탈환하려 공산 군대를 이끌고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영국 나름대로의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한국전쟁에 영국군 파병을 결정한 것은 굉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적 처사다.) 마오쩌둥의 군대와 홍콩의 영국군이 맞선다면 패배할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상하리만치 홍콩을 그냥 내버려 뒀다. 사실 여기에는 마오쩌둥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는데, 미국에 의해 중국이 봉쇄당하자 가장 가까운 자유 항구인 홍콩을 되찾기보다는 그대로 둔 채 중국의 이익에 맞게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동안 홍콩은 영국의 '긍정적 불개입주의' 아래 경제적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더욱 부유해졌다. 1961년부터 1981년까지 홍콩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9.9퍼센트에 달한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이때 등장했다. 홍콩, 싱가포르, 대만, 그리고 한국. 물론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정치적 완전한 자유는 없었다.  


1984년 홍콩반환협정체결

 협정의 체결 배경에는 신계 지역이 영국의 영구소유가 아니라 99년 임차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신계 지역 없이 구룡반도와 홍콩 섬만 가지고는 인프라 부족으로 남은 홍콩의 자립이 어렵기 때문이다. 영국은 신계 지역의 임차를 2012년까지 연장하자고 중국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99년 임차기간이 끝나는 1997년에 신계 지역을 포함한 모든 홍콩특별자치구를 반환하기로 중국과 협정을 체결한다. 


 이 회담 테이블에서 '일국양제'가 등장했다. 영국 측에서 반환 후 홍콩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훼손을 염려하자 덩샤오핑이 먼저 반환 후에도 중국은 일당독재-공산주의로 가고, 홍콩은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할 테니 염려 말라고 협정을 체결시킨 것이다. 


 홍콩 내의 반응은 두 개로 갈렸다. 친중 민족주의 세력들은 하나의 중국을 꿈꾸며 기뻐했고 실제로 홍콩 내에서 '나는 중국인'이라는 노래가 유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세력을 피해 중국을 떠나온 반중 반공산주의 세력이나 일당 독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홍콩 반환을 반대했다. 게다가 홍콩반환협정이 체결되고 1년 뒤인 1985년 평화시위대를 덩샤오핑이 탱크로 깔아뭉개버린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며 다수의 홍콩인들은 얼어붙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수많은 홍콩인들이 영국령 국가로 이민을 떠났다. 나는 감히 이 시기를 홍콩인의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싶다. 왕조현과 장국영 역시 국적을 캐나다로 바꿨다. 




1997년 홍콩, 반환되다. 

중국 : "일국양제? 글쎄? 뒷간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른 거 아닌가?


 1997년,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됐다. 그리고 차츰 시간이 지나자 중국은 일국양제를 흔들려는 시도를 계속해서 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홍콩 시민들은 2000년대부터 계속해서 항거해야 했다. 


 홍콩의 우산 혁명이 있었던 2014년에서 만 3년이 지난 2017년 중국은 홍콩 반환 20주년을 맞아 "홍콩 반환 협정은 역사일 뿐이다"라며 대놓고 일국양제를 파기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그리고 2019년 현재. 홍콩의 자유 투사들은 자유를 위해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다. 한국의 대학생들도 대자보를 통해 이를 응원하고 있음을 기사를 통해 접할 때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모른다. 



 어쩌면 홍콩인들은, 근대화 이래 단 한 번도 마음 놓고 자유를 누려본 적 없는 이들인지도 모른다. 이런 이들을 위해 우리가 포스트라도 한 번 더 올려주고, SNS로 나마 응원이라도 한번 더 보내주고, 마음으로나마 염원을 보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FREE HONGKONG 

STAND WITH HONGKONG 

홍콩에게 자유를



본 글의 홍콩의 역사 부분 자료는 최창근 저『가희 덩리쥔』, 한길사 (2017)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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