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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Sep 22. 2019

한국사회 빈곤의 그늘- 엄마와 아들의 쓸쓸한 죽음

우리는 한민족, 한겨레라면서요...


막상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야 쉽게 체감치 못할지는 몰라도 한국은 올해 GDP 세계 12위의 제법 잘사는 국가다. 한국전쟁 후 한때는 아프리카보다 가난한,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은 이제 G20 정상회담에도 꾸준히 포함되어 국제현안에 대해 의논하는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국가가 됐다.



아직도 믿기 힘들다면 이 서양발 기사들을 보시라. '어떻게 한국이 그렇게 부자가 됐나요?' '왜 한국이 그렇게 부자인가요?' 외국에서도 한국은 부자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 모두가 부자일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분명 빈곤의 문제는 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이 빈곤의 문제는, 대학등록금 4백만원 다내어놓고 자취방 월세 천에 오십을 다내어놓고 "우리집은 참 가난해"라고 말하는 빈곤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 두사람의 이야기다. 



2019년 8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모자 시신 발견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11016030


지난달 13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임대아파트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신. 엄마(한성옥, 42세)와 아들(김동진, 6세) 


발견 당시 경찰은 이미 이들이 사망한지 두달은 되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고 자살의 정황도 없었다. 물 한통 없는 텅 빈 냉장고와 잔액 0원이 찍힌채 남겨진 한성옥씨의 통장이 모자가 겪었을 처참한 빈곤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탈북자 한성옥(42) 아들 김동진 (6)


故 한성옥씨의 영정


북한태생의 한성옥씨는 2009년 굶주림과 자유를 찾아 중국과 태국을 거쳐 남한으로 탈출했다.


한성옥씨의 남한 정착생활 초기를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성옥씨는 남한 정착을 위해 제빵 기술을 배우는 등 매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성옥씨는 엄마였다. 한성옥씨에게는 탈북 후 중국에서 중국동포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녀는 중국에 두고 온 아들을 많이 그리워했고 남편을 설득해 남편과 첫 아들을 모두 한국에 데려왔다. 남편은 한국의 조선소에 취업 했고 한국에서 그녀는 둘째 김동진군을 임신한다. 그녀가 임신중에 남편이 그녀를 학대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녀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만 남편이 그녀를 학대한것인지, 아니면 수차례 그녀가 가정폭력의 희생양이 되어왔으나 그나마 한국땅에 왔기에 문제가 물위로 드러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내와 친아들의 광화문 빈소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그녀 남편이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2013년 그녀가 사랑해마지 않았을 둘째 아들 김동진군은 선천적으로 뇌전증을 앓으며 태어났다. 


한국 조선소 사업이 어려워지며 한성옥씨의 남편은 실직을 했다. 그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성옥씨는 중국에서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둘째 아들 김동진군과 둘만 한국 서울로 돌아온다. 미국 언론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작년 9월 한성옥씨는 동료 탈북자에게 연락해 한국에서 다시 일자리는 구할 수 있을지, 뇌전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맡아줄 보육센터를 찾을 수는 있을지에 대해 매우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2018년 9월. 여기까지가 한성옥씨가 세상과 나눈 마지막 '접촉'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49/0000175716

2019년 8월 12일 보도 기사




경찰의 사인불명 발표와 인권단체의 분노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2400987


경찰에 따르면 모자의 시신은 이미 높은 수준의 부패 변성이 진행돼 있어 확인에 제약이 있었지만,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선 뚜렷한 질병이나 손상이 없었고 약물이나 독극물도 검출되지 않았다. 경찰은 “부검 감정 결과와 현장 감식, 주변 탐문 결과 등에서 특이사항이 없어 내사 종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기존 '아사추정'은 깨끗이 지우고 '사인불명'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당연히 인권운동가들은 반발했다. 경찰발표에서처럼 1)뚜렷한 질병이나 2)손상이 없었고 3)약물이나 4)독극물도 검출되지 않았고 5)주변탐문결과 특이사항이 없는데다가 6)발견당시 식료품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 8)공과금이 밀렸고 9)통장잔고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때 '아사'임에도 왜 '아사'라고 발표하지 못하냐는 것이다. 


 모자는 과거 기초생활수급비를 10개월간 수급한 이력이 있는 '사회취약계층'이다. 이런 이력의 모자가 18개월 동안이나 임대아파트의 임차료, 공과금과 건강보험료를 체납해오는 동안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모자의 생활을 살펴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광화문에 한성옥 모자를 추모하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성옥아 미안해~ 성옥아! 아들과 단 둘이서 굶어 죽을 때 얼마나 무서웠니...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스스로 빈소를 지키는 시민들


정부는 모자의 시신을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하려 했다. 중국에 있는 남편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시민들과 인권단체들은 자발적으로 광화문에 모자의 빈소를 차렸다. 


나는 한번도 가지를 못했다. 변명이라면, 나랑 정말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몰랐다는 죄책감이 사슬처럼 나를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제가 관악구 봉천동 살면서 배달음식 만이천원짜리 시켜먹습니다!) 


내가 건강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 월급을 받고 유럽으로 떠나기 전까지 경찰의 추정이 맞다면 한성옥씨 모자는 나와 같은 타임라인에서 살아있었다. 세상에는 무수한 인연의 끈들이 있다는데. 그 끈이 한번만 닿았어도 상대적으로 풍족했던 내 재정 형편상 내가 돕지 못할 이유는 없었는데. 오늘도 죄송함의 정서만 쌓인다. 




왜 계속 반복되는가 - 2014 송파 세모녀법 그 후  


2014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정부는 법률 제·개정을 통해 다시는 관련 사건이 없을 것임을 우리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2018년 증평 모녀사건, 2019년 망우동 모녀사건 그리고 또 같은해 한성옥씨 모자 아사사건처럼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일가족이 사망하는 비극은 반복되고 있다.




탈북자는 남인가요?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내 일처럼 여기고 서로 서로 도와가며 한집처럼 지내자 우리는 한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초등학교때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준 노래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에 따라 북한주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할 의무를 갖는다. 북한인권주민의 인권보장은 선택이 아닌 헌법적 명령이다. 


나 "아니요 같은 한국사람끼리..." 
그분(북한태생) "그렇게(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드물어요..."


나는 오래전부터 통일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레 북한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관련 행사에도 참여하게 되고 북한인권 다큐멘터리도 찍게되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시비가 붙었는데 선글라스를 낀 어떤 남자가 건들건들하게 내게 다가와 "북한 사람이에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니요?" 했는데 그 사람이 물었다. "근데 왜 해요?" 할말을 잃었다. 전혀 새로운 관점이었거든. 그때 처음 알았다. 남한사람 북한사람 나눈다는걸. 아니 그렇게 실컷 같은 민족이라고 가르쳐놓고, 막상 곁에 오니까 선을 긋는건 무슨 무례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하나 더


탈북자는 난민이다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has acknowledged this issue, particularly on the account of North Korean defectors.


남한에서는 탈북자라고 부르는데 UN등 국제사회에서는 North Korean Defector라거나 North Korean Refugee라고 표현하며 이들을 난민의 범주로 인식한다. 탈북민 문제는 국제난민의 날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난민인 탈북민들에 제발 침묵하지 말자. 


그리고 모자의 빈소엔 태극기가 있었다



이건 그냥 사족 


나는 신문사에서 북한인권 기사 쓸때도, 북한인권 다큐멘터리 PD할때도 무려 '빨갱이냐'. '보수꼴통이냐' 하는 소리를 동시에 들어봤다. 심지어는 그저 우정으로 나를 도와주던 순진한 내 친구에게까지 '너 빨갱이냐'는 소리를 던진 무식한 사람도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왜 뭐든 왼쪽 오른쪽을 못갖다붙여서 안달인지를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다. 내가 학사를 정치학 비슷한걸로 따서 그런 사람들이랑 또 작정하고 파고 들어 대화해보면 또 잘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아무튼 누가 읽을지는 모르지만 부디 이 슬픈 죽음 앞에 또 좌우논쟁하는 분들 없으시길 바라는 노파심에 적어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배고픔 없는 천국에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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