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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Mar 31. 2021

내가 펜을 빌리지 않는 이유

어렸을 때부터 이어진 습관이 하나 있다. 바로 기록하는 습관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기록은 일상이자 삶이다. 항상 가방에는 노트와 펜이 있었다. 10년 넘게 고집하는 볼펜 브랜드도 있다.  0.38 mm의 검은색 볼펜과 몰스킨은 항상 여분을 사놓는다. 여행 준비를 할 때 카메라보다 먼저 포켓 사이즈의 몰스킨 노트를 챙긴다. 최근 블로그를 운영하면서부터 아날로그 기록에서 디지털 기록도 더해져 기록의 양이 더 늘어났다. 매일 수없이 노트를 만들고 기록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정리하긴 하지만 줄어들지 않는다. 이 정도면 메모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글을 쓰는 사람이 된 지금 나를 위한 기록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하는 기록은 두 가지 유형이다.

첫 번째는 미래를 위한 기록이다.  생각, 정보에 관한 기록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외부에서 알게 된 유용한 정보를 바로 보존하고 싶은 경우에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을 해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도가 감춰져 있다. 대표적으로 독서노트, 아이디어 메모들이다. 특히 에버노트에 적은  80% 이상은 이런 기록이다.


독서/ 참고 노트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기록한다. 유튜브에서 좋은 영상을 봐도 적어놓는다.  필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거나, 배우고 싶은 것들을 모조리 적어놓는다.  특히 좋아하는 책에서  머리를 때리는 구절을 메모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 어렵다. 내가 책을 한 번만 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순간에 기록하지 않으면 다시 찾기 힘들어진다. 잘 읽은 책들은 블로그에 서평 형식으로 좋아하는 내용들을 기록해둔다. 내가 쓰는 글들과 행동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독서 노트 만들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독서 노트가 멈추면 생각이 멈추고, 활발하게 쓸 때는 스위치가 켜진 듯 더 많은 생각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노트

독서/참고 노트가 외부의 생각을 옮겨 적는 것이라면 아이디어 노트는 내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다.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을 빨리 옮긴다. 길을 걷다가, 또는 커피를 마시다가도 생각나는 것을 기록한다. 책을 읽을 때는 가장 머릿속이 활발하다. 이것저것 글감이 떠오르면 빨리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써본다. 생각이라는 것은 매 순간 떠오르지만 잊는 것도 순식간이다.  적어놔야지 하다가 막상 노트를 펴면  무슨 이야기를 쓰려고 했더라? 하는 일도 많다. 아이디어의 내용은 막상 적어놓으면  뜬금없기도 한데, 예전에 했던 생각을 똑같이 하고 적어놓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행동을 해보면 어떨까?라고 써놓기만 했는데, 몇 달 뒤에 똑같이 하고 있기도 하다.  글에는 힘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써놓으면 어느 순간에 행동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이디어 노트는 나중에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씨앗을 심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디어는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아이디어는 모르는 사이 자라나서 행동으로 변한다. 특히 글을 내가 직접 써야 하거나, 말을 해야 할 때 이런 기록들은 빛을 발한다. 글을 새로 쓸 때 나는 굳이  아이디어를 찾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는다. 사이트를 찾거나, 책을 새로 읽지 않아도 된다. 나만의 보물창고를 둘러보고, 꺼내고 싶은 것을 꺼내 조합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나중을 위한 투자처럼 차곡차곡 쌓아놓는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중간 어떤 기록을 했는지 살펴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져야 한다. 써놓고 다시 보지 않는다면 기록을 하나마나다. 




두 번째는  현재를 지탱해주는 기록이다. 성과나, 감정상태를 기록하는 것이다. 일기나 성공일지가 대표적이다. 


일기

인생의  최초의 기록다운 기록은 일기로부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나는 일기를 써왔다. 나는 꽤 일기장이 다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다고 여겨왔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오래전부터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일기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즐거울 때도 우울할 때도 일기를 썼다. 감정이 복잡하면 더 열심히 일기에 감정을 옮겨 적는다. 쭉 글을 쓰고 나면 오히려 감정이 풀린다. 기록이란 비움의 역할도 있다고 하지 않은가. 지금도 남들에게 보여주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일기는 따로 쓴다.  일종의 마음 챙김 같다. 감정을 비우는 것에는 여전히 일기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일기는 현재를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록 중에 하나다. 


성공일지 

매주 일요일 오전이 되면 일어나자마자 성공일지를 적는다. 성공일지라고 말하지만 주간 검토다. 주간에 있었던 변화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다. 중간점검이라고 보면 된다. 재프 센더스의 <아침 5시의 기적>이라는 책에서 나온 템플릿을 참고하여 만든 성공일지를 1년 가까이 쓰고 있는데, 최근 가장 효과를 보고 있는 기록이다. 


목표를 정하고, 그 과정에 대해서 진척사항을 체크하거나, 기록하는 한다.  잘했던 점 3가지, 실패 사항 3가지, 개선사항 3가지를 적고 한줄평도 짧게 적는다. 이런 방식을 더 크게, 분기별로, 반기별로, 연도별로 한다.  많은 시간이 들지는 않는다. 보통 10분 -15분 정도다.  이런 성과의 기록은 내가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무기력할 때 효과적이다. 최근에도 이 기록의 덕을 보았다. 


처음으로 돈을 받고 진행하는 강의를 하게 되었다. 나는 하겠다고 말해놓곤 막상 강의일이 다가오니 걱정이 되었다. 2시간짜리 강의였다. 재능기부라고 30분-1시간 하는 것과 콘텐츠 양이 달랐다. 그 시간을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유료로 받는 만큼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 역시 들었다. 하지만 두려워도 할 일은 해야 한다. 강의안과 대본을 고치길 반복하다가 문득 성공일지가 생각났다. 성공일지에는 개별적인 프로젝트도 진척사항을 기록해두었는데, 스피치 노트도 그중 하나였다. 스피치 노트를 꺼내보니 작년부터 에버노트에 차곡차곡 만들어둔 재능기부 PPT들과 피드백이 고스란히 있었다. 연습을 한 기록도 있었다. 작년 봄부터 관련 주제를 3,4번이나 했었고 다른 이야기도 11번이나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의 피드백도 있었고 반응이 좋았던 몇 발표도 있었다. 기록은 객관적으로 알려준다. 1달에 1번씩은 누군가의 앞에서 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이 일을 했었다고 말이다. 


불안한 감정은 순간에도 다양하게 변한다. 아침에 즐거웠다가 저녁에 너무 힘들어 지칠 수도 있고, 많은 일을 했더라도 뭘 한 건지 모를 때도 있다. 즉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순간 느껴져도 , 잘 진행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내 기록들을 보면 어느 부분은 성장했고 얻는 것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다시 또 마음을 다 잡는다. 잘하고 있다는 증거가 기록되어있으니까. 


나는 남들에게 펜을 빌리지 않는다. 항상 노트와 볼펜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기록한다. 기록은 내가 더 나은 길로 가도록 항상 도왔줬음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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