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도피 그 사이에서
서울에 산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더운 날씨는 익숙지 못하다. 장미가 지고 능소화가 피는 계절이 오면 숨이 죽은 풀처럼 지치고 힘이 없어진다.
나의 고향은 부산 영도라는 곳이다. 그곳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여름, 겨울의 온도차가 크지 않아 큰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겨울에 눈을 보는 것도 손에 꼽을 일이지만 폭염 또한 없었다. 여름엔 미지근한 바람이 바다향을 머금고 밀려왔다. 아버지는 그게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여름향기보다 도시의 삶을 동경했다.
처음 서울에 와서 보낸 겨울과 여름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홀로 서울에 올라와 5평 남짓한 원룸에서 계절을 보냈다. 뼈가 시린듯한 추위도, 몸이 녹아 흘러버릴 듯한 더위를 버텼다. 몇 해가 지나니 겨울은 익숙해졌다. 오히려 눈을 볼 수 있다는 건 좋았다. 겨울을 버티고 가장 좋아하는 봄을 지나면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해가 지날수록 내륙의 더위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스팔트에 이글거리는 열기와 햇빛을 견디기 힘들 때 나는 영도로 향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지만 사실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상하게도 서울에 올라온 뒤 여름의 초입부에 나는 살짝 중심을 잃은 곡예사처럼 감정적으로 고꾸라지는 것이다. 마치 마라톤 경기를 하듯 열심히 달렸다가 중간에 훅 무너지는 느낌. 무력감. 약간의 우울감. 혼자 살이를 겨우 버티다 그 버거움이 한계치에 다 달았는지도 모른다.
짐을 꾸린다. 도망치듯 대충 옷가지를 넣는다. KTX를 타고 3시간. 고향 영도에 도착한다. 거기선 모든 책임을 다 던져버리고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아이처럼 지낸다. 바다를 마음껏 보기도 하고 몇 시간 동안 멍하게 있는다. 백수의 삶이다. 아무런 의무도 규율도 없다는 사실이 허전하기도 달콤하기도 하다.
책 몇 권을 읽는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지는 않으나 유난히 영도에서 여러 번 읽은 책이 있다. 한국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이다. 안개가 명산물이라는 무진이라는 곳을 주인공은 힘들 때마다 찾는다. 그에게 무진이란 안식처이기도 하고 부끄러운 곳이기도 하다.
내가 좀 나이가 든 뒤로 무진에 간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았지만 그 몇 차례 되지 않은 무진행이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새 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간다는 그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진에 가면 내게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도 아니었었다. 오히려 무진에서의 나는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였었다. 더러운 옷차림과 누우런 얼굴로 나는 항상 골방 안에서 뒹굴었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대열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비웃으며 흘러가고 있었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는 긴 긴 악몽들이 거꾸러져 있는 나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하였었다.
-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을 처음 읽어을 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의 고향 역시 안개가 잦았고, 무진이란 상상 속의 그곳을 머릿속으로 그릴 때 영도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나 역시 도피하듯이 여름만 되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앉고 부산에 내려가곤 했으니까.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첫 버스에서 마음을 정리했다.
도망치듯 떠나는 도피여행은 일반 여행과 다르다. 여행은 일상을 잠시 잊기 위한 휴식이다. 모르는 곳으로 떠난다. 탐험하듯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 즐거운 충격으로 일상을 잠시 잊는다.
내가 영도에 가는 이유는 움츠러들기 위해서다. 이불 안과 같이 나를 해치지 않는 곳. 지구에서 가장 안전한 곳. 지탱해주는 줄과 같은 곳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서울에서 생활했지만 속에는 분투의 조각들이 가득했었고, 그곳을 버티다 나는 외지인임을 문뜩 깨닫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이 이상한 도피 행각을 멈추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서울에서 꿋꿋이 살 줄 알았으나, 내가 안정감을 가지게 된 것은 배우자를 맞이하고서였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치듯 부산 가지 않게 되었다.
올해 여름은 서울에서 적응을 하려 쿨매트를 샀다. 그리고 하나를 더 사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더 이상 이 맘 때쯤 내려가지 않아 서운하실지 모르겠으나, 부디 딸이 서울에서 잘 크고 있다고 여겨주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