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생채, 호박볶음, 시금치나물 등 야채를 넣고 비벼 먹는 비빔밥을 좋아한다. 비빔밥은 야채와 약간의 양념에 덧붙여 마지막에 살짝 뿌려주는 참기름이 있어야 고소한 향기와 그 맛이 확 풍성해진다.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화룡점정이 그런 뜻이 아닐까?
우리 집 냉장고는 부모님의 정성이 담긴 식재료와 음식들로 가득 차 있다. 부모님과 함께 웃고 땀 흘렸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포개진 채로 그 사연이 다시 피어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소주병에는 변하지 않는 부모님의 사랑이 농축된 참기름이 담겨 있다.
지난여름에 부모님 일손을 도왔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농사일을 한 적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잘 알지도 능숙하게 하지도 못한다. 고추가 붉어 보여서 고추를 딸 시기인가 했는데 부모님은 고추는 아직이고 참깨 수확이 더 급하다고 했다. 아빠가 깻단을 베어 나르면 엄마와 나는 한 아름 정도의 깻단을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한동안 잘 말린 후에 깨를 털어내어 참기름을 짜낸다고 한다. 참깨 수확은 칼날 같은 뙤약볕이 살갗을 찌르는 때 해야 해서 땀에 젖은 옷이 몸에 칭칭 감겼다. 참기름에 담긴 노동이 이런 힘든 과정인 줄 몰랐던 나는 빨리 끝내고 씻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겨우 버텨냈다.
농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가 요즘 들어서야 일 년에 두세 번 정도이지만 일을 도우면서, 농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만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농사는 씨 뿌리고 키워 거두기까지 몸을 계속 혹사해야 하는 노동이다. 아무리 기계화되었다고 하지만 직접 몸으로 해야 하는 일도 많고 적당한 햇빛과 온도, 비를 잘 신경 써야 수확의 기쁨도 가능했다.
농사 지어 자식들을 먹이고,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부모님은 몸을 단정히 꾸밀 틈도 없는 세월을 보냈음을 나는 이제야 헤아린다. 그렇게 애쓴 삶의 흔적들이 부모님의 울퉁불퉁한 손과 흙이 낀 손톱, 그리고 온몸에 충실한 삶의 훈장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제 그 손을 자주 잡아 드린다. 그리고 부끄러워 말로는 못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속삭인다.
"이제야 저는 당신의 굽은 허리와 울퉁불퉁한 손가락, 검은흙이 낀 손톱이 무엇을 뜻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