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묻은 손, 마음 담은 글
농사는 철학이다
이동호 저자는 “농업은 철학”이라 말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일이어서일까. 언뜻 생계를 위한 노동처럼 보이는 농사가 어째서 철학이 될 수 있을까.
농부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 씨를 뿌리고, 흙을 고르고, 물을 주지만, 결국 작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자연의 몫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한 해 농사는 허사가 되기도 한다. 농부는 이 절대적인 한계를 안다. 그렇기에 자연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대신 변화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자연과 타협할 방법을 찾는다. 그것이 농부의 태도이자 철학이다.
3월 초, 시골 부모님 댁을 찾았을 때 이웃집에서 봄배추를 심고 있었다. 5월 출하를 목표로 키우는 작물이었다. 이 배추는 농부들에게 중요한 소득원이다. 그런데 엊그제 예상치 못한 폭설이 내렸다. 봄을 앞두고 찾아온 겨울의 심술. 나뭇가지 위에는 10cm가량의 눈이 쌓였고, 100년 된 소나무 가지조차 꺾일 만큼 습기가 많은 눈이었다. 나는 이 폭설이 갓 심은 배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되었다.
농부는 이처럼 늘 자연과 맞선다. 그러나 싸움이 아니다. 자연의 뜻을 읽고, 그 흐름 속에서 최선의 길을 찾는 과정이다. 농사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철학적 탐구라 할 수 있다.
농부의 철학은 기다림에서도 드러난다. 도시에서는 시간이 빠를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하지만 농사는 정반대다. 땅이 얼어 있으면 호미질을 멈춰야 하고, 비가 많이 내리면 파종을 미뤄야 한다. 서두른다고 결실이 빨리 오는 것이 아니다.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농부는 흙을 일구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일구는 사람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 누구라도 3월이 오면 한번쯤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볼 만합니다. 현재 삶이 고달파도 한때는 누구나 시인 아니었던가요?” (p.19)
농사는 감각과 직관, 철학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농부는 땅을 보며 계절을 읽고,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며, 기다림 속에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한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은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흙에서 멀어진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흙을 만지고,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자연의 속도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인간에게 본래 필요한 것이 아닐까. 농사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면서도, 동시에 철학이 된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봄, 농부의 철학을 떠올린다. 자신을 '고독한 농부'라고 했지만, 논밭을 배경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내게는 '고독' 보다는 '낭혜한 농부'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삶에도 그런 지혜와 성찰이 스며들길 바란다.
이동호『어느 고독한 농부의 편지』(책이라는 신화,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