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의 기억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밭이 있다. 사방이 하얗게 밝아 눈이 시릴 만큼 눈부신 마을이다. 류현재의 소설 『빼그녕』은 서정적인 풍경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평화로운 배경 뒤편에는 1970년대 유신 시대의 그늘이 겹쳐 있다. 송가네와 백가네로 갈라진 마을, 이권 다툼과 편 가르기,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순박함이 집단의 이기심과 결합할 때 벌어지는 잔혹한 장면들. 이 모든 것을 일곱 살 소녀 빼그녕의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빼그녕은 천재다. 태어난 순간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는 아이. 빼그녕은 자신의 이름 백은영을 일부러 ‘빼그녕’이라 쓰며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짐처럼 여긴다. 어른들의 말과 표정, 숨겨진 폭력과 위선을 너무 일찍 알아버리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이의 시선을 빌려 어른들의 세계를 비춘다. 그 세계는 추하고 모순적이지만, 끝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놓지 않는다.
이 소설은 나를 내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애기똥풀을 뜯어 줄기에서 나오는 노란 진물을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듯 하고 놀던 시간, 시골집에서 오래도록 키웠던 송아지 두세 마리, 엄마가 끓인 라면에는 꼬불꼬불 면보다 국수가 더 많았고 그나마 라면은 아빠와 남동생의 몫이었던 기억. 그때 먹지 못했던 라면을 고등학교 시절 자취하며 삼시 세 끼로 원 없이 먹었던 일, 한때 나의 최애 음식이 라면이었던 시간까지. 『빼그녕』은 이렇게 개인의 기억을 살포시 흔들어 깨운다.
책을 읽으며 오래 남은 문장이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거야. 중요한 건 이별을 잘하는 거야. 그건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성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워. 그래서 나는 이별을 잘하는 사람들이 제일 훌륭하다고 생각해.” (97쪽)
『빼그녕』이 던지는 질문은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은 떠남과 상실을 비극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마을이 갈라지고, 관계가 무너지고,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밀려나지만,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별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순박함이라는 이름으로 방관했고, 살아남는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순간들. 빼그녕은 그 모든 장면을 기억하고, 우리는 그 아이의 기억 앞에서 어른이 된다.
그래서 『빼그녕』은 사회소설이자 성장소설이라 부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어떤 어른으로 살아왔는지를 묻는 이야기다. 방관자로 머물지 않았는지,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긴 채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사월이면 하얀 배꽃이 핀다. 시골집 뒤꼍을 환하게 밝히던 배꽃이 떠오른다. 봄이 오면, 올해는 그 꽃을 보며 『빼그녕』을 함께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류현재 『빼그녕』(마름모,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