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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Sep 30. 2024

#요가일기, 2024년 4월의 기록(vol. 2)


2024. 04. 14. (일) 빈야사, 하타




1.

빈야사


조합 업무로 망원동 일대를 한 바퀴 쭉 돌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일요일 아침 마을 일대는 한산했지만 요가원 안은 수련을 위해 발걸음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손목과 발목을 가볍게 풀고 워밍업 플랭크도 한 뒤 바로 빈야사를 시작했다. 도마뱀 자세와 연결하여 와일드띵, 바시스타아사나, 사이드플랭크와 아르다찬드라사나를 지나갔다. 한 세트처럼 묶인 이 움직임들이 예전 같으면 너무 버거웠을 텐데 몸이 튼튼해진 것인지 오늘 컨디션이 좋은 것인지 힘들어도 멀쩡한 호흡으로 침착하게 잘 연결해가는 내가 기특하다.


반개구리 자세에서 발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골반 대퇴 고관절 부분의 회전하는 힘을 단련했다. 그것만으로도 시원 뻑뻑 어딘가 낯선 감각을 느끼고 있었는데 발을 들어 올린 상태에서 무릎까지 띄우게 되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가동성이 떨어진 부분을 건드려 보는 좋은 경험이었다.


3인 1조로 함께 우르드바다누라사나를 연습했다. 선생님의 설명 도구가 되어 시범을 보이고 난 뒤 돌아오니 나는 짝이 없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이 모둠 저 모둠을 한량처럼 어슬렁거리며 참견하고 같이 연습하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문득 여기서 아는 얼굴이 꽤 많아졌다는 걸 알게되었다. 수업시간 파트너 연습들을 통해 사람들과 느슨한 연결고리가 생겨나고 있다. 서로를 릴렉스 시켜주는 익숙함 한 줄기.


시르사아사나에서 시르사파다로 연결하였다. 오늘은 다행히 착지가 비교적 안정적이라 뭔가 산뜻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갑자기 자신감이 솟구치더니 점프를 하여 시르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연습해 보고 싶었다. 그런 시도를 여러 번 해본 적이 없어 사실 요령도 없는데 다짜고짜 해보고 싶어 까치발 높게 들어 시동을 걸기 시작하니 눈치 빠른 선생님이 발견하고 도와주셨다. 좌우 힘에 불균형이 있어 넘어가다가 골반이 틀어지고 힘도 부족하여 결국 옆으로 고구라져 무너졌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저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


분명 오늘 아침에 기침을 너무 많이 하고 목소리가 안 나와 급하게 약을 털어먹었고 망원동을 걸어 다니는 중에도 계속 기침이 나와서 수련 중 방해가 될까 봐 무척 걱정이 많았다. 감사하게도 약의 기운이 증상을 눌러준 것인지 수업 중에 기침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힘든 와중에 오히려 어디선가 기운이 마구 솟아나는 변태스러운 기진맥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몸이 아플 때 더 몸을 괴롭히는 고약한 버릇은 나의 괴짜스러운 면 중 하나인데 땀이 줄줄 흐르는 빈야사가 마치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건 요가의 기운인가 약의 기운인가.


사바아사나 중에 허공으로 흩날리는 스피아민트 향이 오늘의 하늘 색깔처럼 쾌적했다.




2.

하타


빈야사 때 옆지기였던 H는 졸려 죽겠다더니 결국 함께 2교시까지 연강을 했다. 너무 힘들다던 뒷자리 Y도. 요가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 이심전심. 졸려죽겠는데 요가 수업을 꾸역꾸역 듣고 있는 심정은 굳이 말을 안 해도 공감이 된다. 빈야사 수강생들이 떠난 빈자리는 다시 새로운 얼굴들로 가득 채워지며 다른 공기와 무드가 등장한다. 선생님이 앞줄의 연강자들을 바라보며 요가하기 딱 좋은 날씨라며 웃었다. 아무렴요, 끄덕끄덕입니다.


오늘의 테마는 파드마아사나. 호흡명상 때부터 파드마를 짜고 시작했다. 익숙한 방향으로 교차하여 척추를 바로 세워 호흡을 고르게 고르게. 배배 꼬인 나의 다리 위로 반듯하게 세워진 내 숨길을 통해 생각도 한 줄로 가다듬고 마음도 차분하게 정돈시켰다. 앉은 자세, 선 자세, 엎드린 자세에서도 파드마를 계속 유지했다. 익숙한 방향에서는 몰랐는데 익숙지 않은 방향에서는 파드마가 무척 어색하고 힘들었다. 단지 다리를 교차해 봤을 뿐인데 이렇게나 좌우 가동 범위가 다르다니 생활습관이 선명하게 낙인된 나의 관절.


시르사에서 파드마 짜고 우르드바 파드마아사나. 후굴도 시도하고 무릎을 내렸다가 올렸다가 하면서 컨트롤도 해보았다. 베이비 바카아사나에서 선 바카아사나로 연습도 하며 컨트롤 가능한 나의 적정선이 어느 지점인지도 호흡을 통해 알아차리고, 서두르면 모든 것이 망해버린다는 것도 우당탕 쾅쾅의 시간을 통해 배워나간다. 바들바들의 시간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 시간을 통과해야만 하며, 온몸의 기운과 정신을 집중하는 연습이 좀 더 나아진 나의 내일을 만들 것이고 그러다보면 사뿐한 어느 날로 데려다 놓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오늘도 욕심 없는 열심.


파드마에 집중을 해본 오늘의 하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위로 곧게 줄기를 세운 연꽃처럼 위로 상승하는 에너지의 시작은 굳세게 움켜쥔 뿌리라는 것을 생각한다. 다리는 꽁꽁 묶어 무겁게, 그 위로 바로 세워내는 나의 줄기는 균형점과 순환을 의식하게 한다.


나의 연꽃은 얼마큼 단단한 뿌리를 가졌을까.

나의 줄기는 얼마나 곧게 뻗어나갈 수 있을까.

우아함을 향해 정진.








2024. 04. 16. (화) 복원



황사 농도가 갑자기 높아져 마스크를 쓰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목이 간질간질하고 눈이 뻑뻑하여 수업 초반에 계속 기침이 나오려고 하여 억누르다가 눈물이 또르르 흘렀지만 호흡을 이어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기침이 소강되었다. 자연의 작은 변화에도 인간의 몸은 이렇게나 휘청이고 불편하다.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위해 한순간도 각성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착한 다짐. 오늘은 '뿌리내림'을 테마로 기반을 생각하며 위로 상승하는 힘도 함께 느껴보기로 했다.


요 며칠 밤 동안 불편한 자세로 책을 읽었더니 오늘 하루 종일 목이 불편하고 왼쪽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가지 않아 난감했다. 목 주변 근육 스트레칭으로는 어림도 없었지만 수련하면서 몸을 이리저리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만 가지고 수업에 참여했다. 불안한 마음을 부드럽게 빗어줄 베르가못 향으로 편안하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단다아사나로 앉았다.


단다아사나. 발음부터가 벌써 단다아사나라니. 니은자로 바로 세운 몸의 지지기반은 엉덩이 같았다. 그로부터 곧게 뻗은 다리와 발뒤꿈치, 바로 편 허리로부터 넓어진 가슴과 목이 등줄기를 팽팽하게 펼쳐준다. 그리고 그 모든 방향의 힘을 조율하는 모더레이터는 바닥을 눌러내는 손바닥이 아닐까 생각했다. 단단한 단다아사나.


비라바드라. 뻗어나가는 힘과 붙잡아두는 힘을 함께 조율하면서 단다아사나만큼이나 튼튼한 전사의 모습으로 내 몸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본다. 워리어Ⅲ에서 몸을 일으켜 나무자세로. 나무는 반달이 되고 반달은 활이 되고 활을 곧게 펴서 스탠딩 스플릿으로 변신하면서 바닥에 닿은 발바닥만큼의 면적이 커다란 내 몸을 지지하고, 그와 함께 반대로 상승하는 발끝의 힘, 땅을 밀어내는 두 손바닥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더욱 견고해지기를 바랐다.


뿌리내림. 어느 곳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생각. 중심부터 말초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는 내 몸을 각기 분리하여 판단하지 말자고 다짐. 통합된 존재로서의 내 몸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기로.


기반 위에서의 자유로움. 그 튼튼한 기반 위에서 나의 자유를 마음껏 펼치고 싶다.








2024. 04. 17. (수) 아쉬탕가



화를 다스리기 힘들었던 하루. 요가수업에서 내 몸은 매트에 데려와 있었으나 나의 의식은 쇳가루가 되어 불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었다. 호흡도 없고 빈야사도 없고 집중도 없고 심지어 즐거움마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가라앉을 수 있을까?


오늘 중 기분이 좋았던 순간도 있었다. 드디어 병원을 다녀왔다. 물론 엑스레이밖에 안 찍어봤지만 대충 훑었을 때 결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하루 중 가장 잘한 일이고 제일 기분이 좋은 순간이 그때였던 것 같다. 등이 아픈 지 두 달은 된 것 같은데 미루기만 하다가 이틀 전부터 지속되는 목의 통증이 병원을 안 가고는 견디지 못하게 등을 떠밀어 결국 나의 손은 병원비를 결제하고 있었고, 이 방 저 방을 드나들며 생애 최초로 물리치료라는 것도 받아봤다. 아무 문제가 없지만 아픈 것을 해결하느라 10만원을 지출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40년 인생을 살면서 정형외과 치료를 받을 만큼 아프거나 다친 적이 없었던 것에 새삼 놀랐다. 몸을 참 사정 없이 격하게 쓰면서 평생을 살았지만 병원을 향할만한 일은 없었던 거다. 그 점을 생각하니 인생을 공짜로 사는 느낌이었다.


진료를 받고 문제가 없다고 들었으니 요가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죄책감이 없었다. 그렇지만 오전부터 이어져 온 강렬한 이 기분과 추락한 기운은 여전히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원인은 알고 있지만 그냥 잘 모르겠다고 모른 척하고 싶은 게 본심이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저녁을 보내며 아무렇지 않고 싶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렇게 침울해진 내가 너무 하찮아졌고 고작 그런 것에 기분이 휘둘릴만한 인간이라는 것이 볼품 없게 느껴졌다. 그런데 수련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침울한 게 아니라 화가 난 거구나.


몹시 화를 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상황이었고 그 마음을 격리시키느라 나의 호흡은 굉장히 차분했고 얕고 가느다랗고 냉랭했다. 가느다란 공기 줄기가 숨길을 겨우 짧게 드나드는데도 몸이 전혀 힘들지가 않았다. 극도의 차분함. 차분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았다. 너른 들판에 혼자 서서 요가를 하고 있었다. 요가가 아니었지. 숨만 붙은 몸뚱이였지. 파리채로 내쫓긴 기분,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 우스워진 기분. 모멸. 이걸로는 설명이 안돼. 평소 수련을 하면서 이런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그걸 잘 다듬고 바라보려고 노력했었지 이렇게 내팽개친 적은 처음이다. 몸을 어떻게 쓰고 왔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화에 휩싸인 가여운 인간. 내 수련을 망치는 껌딱지 감정.


살면서 욕을 해본 적이 손에 꼽힐 정도인데 오늘은 내 입에서 상스런 소리가 그냥 막 튀어나왔다.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지점은 그거였다. 나는 왜 이 일에 이토록이나 화가 난 걸까 하는 것이다. 그게 더 답답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바아사나 시간 즈음 떠오르는 다음 층위의 질문, 나는 상처를 받은 걸까. 이런 게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인 건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처.


나를 갉아먹는 화.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이참에 맞서고 싶은 마음의 충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마음껏 화내고 싶은, 켜켜이 쌓인 감정의 레이어. 답답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데 어딜 가서 소리를 질러야 하나. 매번 이런 식으로 조용히 처리하고 인내하고 삭히는 동안 내게 남은 건 굳은살일까 궤양일까. 자고 일어나면 이 기분이 최소한 절반 정도는 사라져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그랬듯 이 또한 지나갈 테지. 지나가지 않는다면 내가 뚫고 통과해 나가야겠지.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니까.


잘 빠져나가자. 이거는 에피소드야. 이것은 해프닝이야.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땐 짧은 구간 잠시 삽입된 것일 뿐이야. 네가 못난 게 아니란다. 갉아먹지 말자. 그것에 집중하지 말자.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자. 멀리서 바라보자. 토닥이자.


알겠으니까 빨리 자자.








2024. 04. 20. (토) 하타



벽에 붙어서 자리를 잡았다. 벽의 도움을 받는 걸 보니 오늘 수업은 후굴을 많이 할 것으로 보였다. 몸풀기를 열심히 따라갔다. 밸런틱으로 천골 좌우로 엉덩이도 풀고 견갑골 주변 겨드랑이 아래도 풀었다. 겨드랑이 아래 전거근과 소흉근 연결지점, 그리고 활배근 그쪽 어딘가들은 시원하면서도 말이 안 되게 고통스럽다. 감전 버튼.


벽면에 발을 지지하고 사이드 플랭크, 로우런지, 워리어3를 했다. 벽면을 바라보고 발 앞꿈치를 벽에 대고 하이런지로 서서 전후 양방향이 저항하는 힘을 모아서 척추를 세우고, 팔을 뻗어 벽면을 밀어내면서 다리 힘이 도와주는 후굴을 연습했다. 런지에서 엉덩이가 비틀어지지 않으려고 의식하며 정렬에 신경을 쓰면 허벅지와 골반에 상당한 힘이 들어가고 붙타오르기 시작한다. 무릎으로 서서 우스트라. 흉골 끌어올리고 쇄골을 열어내고 골반을 밀면서 다리 사이가 벌어지지 않게 내측으로 모아 내는 것 신경 쓰기. 어떤 것을 해도 전신이 쓰이고 몸통의 측면도 잘 사용해야 했다.


후굴은 정말 전신이 쓰인다. 잘하고 싶으면 싶을수록 딱 그만큼 멀어져 가는 게 후굴인 것 같다. 이전보다 성장했다고 느끼는 순간 더 어렵고 힘든 모습으로 저만치 달아난다.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고 그 모든 걸 잘 지켜내며 안전하고 안정된 행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유연함보다는 강인함을 잘 끌어모아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바들바들 온몸에 지진이 심하지만 단단해지는 어느 날도 오겠지 하는 로망 한 스푼. 하체의 단단함을 기반으로 쓰는 움직임을 기억. 후굴은 허리의 유연성이 아니라 등과 다리의 힘. 상하체의 밸런스를 지켜주는 것은 복부의 힘, 팔과 어깨의 힘도 필요하다. 그렇게 치면 거의 무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 거창하게 생각말고 기반을 생각하면서 야금야금 쌓아가는 것으로 하자.


마무리로 파스치모마따나사나를 하는데 선생님이 납작하게 눌러주셨다. 시원하고 편안한 감각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사바아사나를 잊어버리고 전굴 상태로 계속 머물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사람들 모두 사바아사나를 하며 누워 있는데 나 혼자 그 긴 시간을 접힌 상태로 머물러 있던 것을 알게 되자 조금 웃겼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스르륵.


마치고 선생님께 며칠 전부터 목이 계속 안 돌아간다고 징징징. 네 번째 발가락 마사지라도 해보라고 경락 경로를 간단하게 알려주셨다. 등과 목 증상이 개선되지 않으면 병원에 또 가야겠지. 이제는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









2024. 04. 22. (월) 아쉬탕가



수업 전에 H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선생님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듣고 흥미로운 짧은 토크.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에피소드 자체가 중요하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기대감 가득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몸이 피로하여 차분하게 수업을 시작하고 싶어 수업 전 이리저리 비틀고 늘리며 몸을 풀었다. 체육으로 치면 준비체조. 아쉬탕가는 준비체조가 필요하다. 블럭 두 개를 손으로 짚고 시르사Ⅱ자세에 머물렀다. 상완에 무릎을 얹고 잠시 호흡. 어제 클라이밍 여파가 상체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겨드랑이와 팔이 너무 쑤신다.


어제 유준이와 함께 난생 처음 클라이밍장을 갔었다. 집 근처에도 클라이밍장은 아주 많았지만 어린이 안전 강습을 해주는 곳으로 멀리까지 찾아갔다. 나의 욕구와 일치하지 않아도 어린이를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것, 나름 내가 유준에게 해줄 수 있는 고강도의 친절이었다. 다른 어린이들 사이에서 함께 강습을 듣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벽도 타면서 신나게 놀았더니 전완근이 상당히 뭉쳤다. 유준 때문에 찾아간 곳이었지만 나도 은근히 신났더랬다. 그 덕에 가슴과 겨드랑이 아래도 욱신거린다. 처음 해본 경험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요령 없이 힘으로만 매달려 애를 써서 그런지 여기저기 근육통이 거칠게 흩뿌려져 있다.


옆자리 남자분이 우리 모자에게 처음 하는 사람치곤 너무 잘 탄다고 연신 칭찬을 했다. 어제 해보고 느낀 것은 요가를 하며 단련된 근력이 분명 힘을 발휘하긴 했지만 손아귀와 전완근의 힘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이다. 손이 계속 미끄러져 바닥으로 무수히 추락하곤 했더니 묘한 승부욕이 점화되면서 사람들이 왜 이 종목에 빠져드는지 조금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물론 처음 해보고 뭐라고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유준과 나는 무척 신났었다.


시르사를 하는 동안 어제의 장면이 파노라마로 지나간다. 귀여운 나의 꼬마, 악착같이 오르고 추락하고 웃고 허기지고 수다스러웠던 시간. 그런 걸 생각하니 유준이와 요가도 함께 하고 싶다. 수업 시간에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눈치가 생기고, 선생님들의 큐잉을 알아듣고 따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요가원 등록을 한번 꼬셔봐야겠다. 물론 어린이가 동의해야겠지. 아쉬탕가를 수련하는 중학생의 유준을 상상한다. 요가가 네 삶에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나의 도반이었으면 좋겠다.


시르사에서 팔 간격이 다소 넓어 자세 유지하기가 불편하여 머리를 잠시 띄워서 팔 간격을 조절했다. 그러고 나서는 혼자 흠칫 놀랐다. 나 방금 혼자 머리 들어서 팔 간격 조정한거냐며. 혹시 어제 클라이밍으로 팔 힘이 단련되어 그런걸까. 내심 기쁜 장면. 매일 나의 몸 상태는 비슷한 것 같고 느끼는 비틀어짐이나 부족한 지점도 비슷하지만 매일의 수련들로 야금야금 변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적어도 아는 것을 모른척 하며 대충 지나가지는 않은 덕분이 아닐까. 야금야금이 나에게 손을 뻗어 준 것은 외면하지 않은 시간들 덕분이라며 스스로에게 칭찬 한마디 했다.









2024. 04. 23. (화) 복원



선생님이 나눠주신 캐모마일 향이 마중나온 수업. 함께 섞인 것은 페퍼민트와 자몽이었던가. 아무튼 캐모마일은 스트레스 완화를 돕는다고 알려주셨다. 신기한 자연물의 힘. 오늘의 테마는 골반이었다. 골반을 풀어내고 전후의 느낌을 비교하면서 몸의 쓰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느껴보기로 했다. 앉아서 골반을 돌리며 주변근육과 관절의 인대를 깨우고 기름칠하는 작업을 하니 작동이 멈췄던 파이프에 순환이 시작되는 듯 시원했다.


로우런지에서 다리 힘을 채우고 그네 타듯이 앞뒤로 움직이며 정교하게 골반과 다리 전체의 가동범위를 넓히는 작업을 했다. 균형을 잡으려니 집중력과 근력이 적잖이 쓰였다. 같은 그네 모션으로 하프하누만 작업도 하고 서서히 하누만 아사나로 진입할 때 블럭을 밀어내는 힘과 함께 뒤꿈치를 말단으로 뻗어나갔다. 오른쪽 발이 앞을 향할 땐 술러덩 내려가고 왼쪽 다리로 내려갈 땐 길게 호흡을 가지고 가야했지만 양측 다 골반이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앞꿈치를 단단하게 눌러내며 뜸을 들였다. 합장하고 하늘 향해 찔러낸 뒤 가벼운 후굴, 뽐내기만 하는 원숭이가 아니라 각성하는 원숭이로 변신.


마무리 구간에서 시르사를 유지하며 좌우 교대로 파드마, 하누만도 해봤다. 가볍고 시원한 감각. 오늘도 시야에 들어오는 뒷줄 사람들의 격동적인 연습들. 보고싶지 않지만 요란한 모션 덕분에 강제로 시청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헌신적이고 귀여운 코칭. 다리 띄우지 말고 머리-어깨-골반이 일직선이 된 상태에서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는데도 아무것도 안들리는 듯 계속 점프로 화답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아기자기하게 타이르는 선생님. 잠시 기다리면 다리가 뜨는 신기한 어느날이 곧 찾아올텐데 구경하는 내가 다 안타깝다. 도전적인 저들도 귀엽지만 그 옆에서 따뜻하고 곱게 코칭하는 선생님이 더 귀엽다는 생각.


세상 만사가 귀엽게 보이는 시르사의 힘. 혹시 거꾸로 보면 세상 모든 게 다 귀여운 건 아닐까.








2024. 04. 24. (수) 아쉬탕가



거실에서 수련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있는 어떤 회원님의 말을 원장님이 들어주고 계셨다. 그분이 내게도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공감 내지는 동조를 바랐겠지만 나는 골똘한 표정으로 대신했다. '힘들다'는 것은 개인의 것인데. 요가원에는 돈을 내고 스스로 찾아오는 것인데. 누군가가 힘들게 시키는 게 아니라 그 힘듦은 본인의 선택인데. 힘들다고 말하는 건 본인의 자유지만 왜 수업을 이끄는 분 앞에서 당신 수업이 힘들다고 말하는 걸까. 내 기준에서는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내 의문은 그거였다. 수업마다 난이도도 표시되어 있고 어떤 선생님의 수업 스타일이나 시퀀스가 너무 버겁다면 그 수업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거고 그마저도 힘들다면 다른 수업을 들으면 되는 건데. 그중 어떤 게 안되는 걸까 하는 냉혈 인간적 사유 타이밍. 그토록 결심했던 관용과 너그러움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이해할 수는 있다. 힘든 순간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니 나도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구간은 무지 버겁다. 앞으로도 여지없이 매번 힘들 것이다. 아쉬탕가를 예를 들어봐도 체력적인 도전이 꽤 있는 편이라 힘듦을 감내하고 빈야사를 지켜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쉽지 않음'을 알고 그것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역치를 찾아가는 과정은 말 그대로 쉽지는 않더라도 '편안하게' 임할 수는 있다. 나는 그것을 강인함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힘들지만 억지로 하는 것, 그것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여하는 길이었다. 그 힘듦을 내가 선택한 것이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수련이 된다. 이건 산을 타는 동안에도 느낄 수 있다. 연계 산행이나 종주를 다닐 땐 발과 다리가 아프다 못해 무감각해지고 허기지고 지치지만 나를 여기 이곳 산으로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 모든 책임과 수행과 마무리는 나 말고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었다. 여기로 누가 데려왔어? 내가 데려왔잖아.


쉬워서, 힘들지 않아서 하는 수련은 없다. 나는 난관을 만났을 때 회피하거나 둘러 가고 싶지 않았다. 하겠다고 한 것 중에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만났을 때 그 과정을 거쳐 지나가는 나 자신의 태도를 관찰하는 것도 내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과정을 지나가는 동안 불안과 두려움의 껍질을 깨고 짓물러져 있더라도 조금 더 의연하고 차분하게 임하는 태도의 변화. 그런 시간을 관통할 때 어느새 능숙함이 찾아오고 나는 또 다른 도전의 과정들이 내게 마중 나온 것을 느끼면서 의지와 태도를 다시 한번 정제하게 된다.


선생님이 수업을 열기 전에 하신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매트 위에서의 이 수련은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것. 힘든 순간도 인생이고 편안한 순간도 인생이기에 피하지 않고 계속 연결해나가는 것이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모른척 하지 않는 것.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게 되거나 인지하게 된 개선사항들을 소환하여 교정하고자 노력하는 것. 비록 개선되지 않고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지더라도 해야할 것은 하는 것. 조금 더 나은 수련을 추구하고 방향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태도이자 유일한 희망사항.


'오아시스가 나타나지 않는 사막에서도 묵묵히 걸어가는 힘'

시나브로 나는 도약할 거니까. 결과의 도약이 아니라 태도의 도약으로.









2024. 04. 26. (금) 하타



블럭으로 흉부를 받쳐 눕고 쇄골을 활짝 넓힌 채 시작했다. 앞으로 굽어지내던 어깨가 기지개를 펴는 순간이었다. 엎드려서 어깨를 여는 비틀기를 했다. 어깨의 앞면 뿐만 아니라 반대방향도 늘리기 위해 고개의 방향도 이리저리 조정했다. 늘어나는 기분과 찢어질 것 같은 아픈 감각이 함께 뒤섞였지만 결국엔 시원했다. 마카라아사나처럼 엎드려서 고개를 숙이는 동작들에서 언제나 걸리적거리는 안경. 할머니가 될 때까지 그냥 안경을 쓰고 살자고, 평생 수술 같은 건 안하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요가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안과를 달려가고 싶었다. 안경잡이 인생.


엎드린 자세에서 깍지 낀 손을 뒤로 뻗으며 살라바아사나를 시도하면서 후면을 강하게 조였다. 엉덩이와 등이 힘들었고 다리를 뻗어 유지하느라 허벅지도 불탔다. 그러나 살라바아사나 후에 바로 연결한 부장가아사나는 덕분에 수월했다. 메뚜기자세에서 이미 워밍업이 되고 단련이 된 부분들이 부장가에서 힘을 발휘했다. 가슴을 활짝 펴려고 내가 열 수 있는 최대치를 연 것 같은데 아무래도 느낌상 어깨가 앞으로 말려있는 기분이 든다. 부장가를 하는 내 모습을 나도 옆에서 관찰하고 싶다.


하타 수리야 몇 회 하고 다누라사나도 덜덜거리며 유지했다. 우르드바로 끙차 활짝 펴내고 비라바드라와 연결하여 다리 사이로 손목 바인딩 후 극락조자세도 이었다. 선물받은 순간. 양쪽 다리의 힘이 튼튼하게 버텨주어 오늘은 양쪽 다리 모두 한번에 번쩍 들어올려 무릎도 쭉 펴냈다. 이런 날은 자세에서 나올 때도 평소보다 몇 배나 신중해진다. 끝까지 무너지지 않으리라 집중 또 집중.


내일 등이 쑤시겠지.









2024. 04. 29. (월) 아쉬탕가



내일이 휴일이라서 그런 건지 우연인 건지 오늘 3층 수업에 많은 사람들이 매트를 펼쳤다. 스퀘어포즈로 앉아 수업을 열었고 측면도 늘리고 쇄골과 골반을 열기도 했다. 로우런지 자세에서 비틀기도하고 후굴도 하고 하프하누만으로 다리 뒷면도 늘려냈다. 블럭을 놓고 눌러내며 시르사2도 유지하다가 마무리 하고 아쉬탕가 시퀀스로 들어갔다. 수업 전에 몸을 이리저리 쓰고 늘리고 비틀고 조이면서 열을 내고 호흡을 정돈하였더니 리드미컬한 수련으로 자동 세팅 되었다. 후끈함과 후련함 그 사이에서 아쉬탕가를 시작할 수 있어 좋았다.


스탠딩의 흔들거림이 적은 날이었다. 수리야를 할 때마다 휘청거려서 신경쓰였는데 오늘은 조금 덜 한 것 같아 그거 하나만으로도 안정감이 든다. 프라사리타 D에서 팔과 어깨 신경쓰느라 전굴을 깊게 하지 않고 뜸들였는데 선생님이 납작하게 눌러주셔서 속 시원히 내려갔다. 눌러진 몸을 유지하는 것은 복부의 힘이었다.


땀방울이 곳곳에 맺히고 몸이 미끌거리기 시작한다. 수련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등이 더운 것을 잘 못견디는 몸이라 등 파인 옷을 좋아라 하는데 그 덕에 내 매트는 등에 흐른 땀 때문에 축축해지고 발이 미끌리고 엉망이다. 매트 크기의 긴 요가타올을 쓰자니 수련 중에 너무 불편할 것 같기도 하고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피니싱 파드마에서 호흡을 길게 이어갔다. 천장을 바라보는 시선. 활짝 열린 가슴과 그에 따라가는 마음, 그리고 호흡. 정돈을 하기에 정말 좋은 아사나인데 나는 목이 늘 힘들다. 고개를 뒤로 획 넘기지 않기 위해 가슴이 바라보는 방향과 고개의 방향을 일치시키려고 하는데 그 각도에서 목을 세우고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다. 시르사에서 머리 띄우고 턱을 앞으로 접고 당길 때도 팔이나 복부가 힘든 것보다 목이 제일 힘들다. 목에 힘이 많이 약한 것일까. 유지하는 자세가 잘못된 걸까. 목에 힘을 빼면 고개가 뒤로 후룩 재껴진다. 모가지의 힘.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예전에 목근육 강화운동을 했다가 다음날 너무 힘들어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온 적이 있었다.


목의 피로감. 오래 묵은 숙제.

모가지가 약해서 슬픈 짐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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