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화분(花盆) 3년상(三年喪)
이 화분은 수명이 참 오래가네!
청소도구를 정리하다가 손톱이 깨져 상처가 났다고 나이 든 남자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나이 들면 손톱마저 약해져 조금만 부딪혀도 깨지고 난리라며 투덜대신다. 손가락에 밴드를 붙여드리고 있는데 정수리 위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3년째 죽은 채로 살아있는 난(蘭) 화분을 보고 한 말이었다. 이 화분은 수명이 참 오래가네. 세면대 쪽 창가에 온종일 서서 바싹 마른 잎사귀들을 떠받쳐 모시며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화분을 보자 나도 좀 멋쩍긴 했다. 하늘 향해 삐죽 튀어나간 모양새가 살아 보겠다고 빛을 쫓아 싹 틔운 기지개인가 싶었다.
아, 이거 3년째 죽은 듯이 살아있는 겁니다. 하하.
그러게 말이야, 우리 보건 선생님이 수명을 늘려놨네.
화분을 어디에 어떻게 버려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방치하기 시작한 게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다. 세면대 위 콘솔을 청소할 때마다 그 위에 있는 물건들을 이리 놨다 저리 놨다 하면서 걸레질을 하는데 늘 이 화분도 이리저리 잠시 이동을 하며 마치 하나의 소중한 구성원인 듯 여겨지고 있는 중이다. 버려야지 생각하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갈 테지.
나는 부쩍 무척 게으르다.
안 하고 싶은 건 끝까지 피하고 싶고, 급하지 않은 건 되도록 뒤로 미루고 싶다. 그러다 보니 집에는 신문이 쌓이고, 베란다엔 재활용 플라스틱 쓰레기가 재활용되지 못하고 한 포대씩 묶여 남겨져 있으며, 화분은 죽은 채로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나 일반 쓰레기는 놔두면 악취가 나니까 제 때 버리지만 플라스틱은 깨끗하게 씻어서 말린 것들이니 모아놔도 딱히 피해가 없어 급하지 않으니까 미루는 중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야 신문을 안 봐도 대충은 알 수 있고, 정치나 경제 같은 건 결국엔 내 뜻대로 되진 않을 테니 궁금하지도 않다. 어떤 현상에 관심을 가지면 정확히 알고 싶을 테고 혹여 이 내용이 편향된 이야기는 아닐까 또 신문을 의심하기 시작하며 이것저것 찾아보겠지. 이 얼마나 귀찮냐 말이다. 그냥 저렇게 쌓여있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
화분, 그래 화분은 이야기가 좀 다르지. 살 땐 예쁘다고 샀지만 죽었으니 버려줘야 하는데 죽은 이파리와 흙을 화단에 버리면 되겠다 했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혹여 내 화분이 감염병에 걸린 화분이면 죄 없는 우리 싱그러운 화단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여 멈칫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내겐 아무 필요 없는 저 화분 그릇은 어쩌지? 토기니까 일반 쓰레기인데.. 종량제 봉투에 담아서 버려야겠지? 저거 하나만 넣고 나면 공간이 많이 비니까 다른 쓰레기를 채워서 같이 버려야 할 것 아냐. 학교에서 쓰는 물건은 어쨌든 기승전결 절약이 미덕이니까. 토기를 깨야할 필요는 없겠지? 가만 보자, 화분을 들고 화단으로 내려간다-흙과 이파리를 화단에 쏟아 붓는다-빈 토기를 들고 다시 보건실로 올라온다-종량제 봉투에 담는다-남은 공간에 다른 휴지통에 있는 쓰레기를 옮겨 담고 묶어서-다시 쓰레기장으로 내려간다. 일련의 절차를 생각하니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찮음이 솟구쳐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근데 처음부터 그냥 화분 째로 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버리면 되는 거였잖아. 약간 좀 멍청했네 그려.
귀찮음과 게으름에 대한 변명을 해보자면 이런 거다.
내가 왜 이렇게 귀찮고 게으른지 생각해봤다.
이유는 단 하나, 잘하고 싶어서였다. 뭔가 하나를 시작하면 반드시 마무리가 있어야 하고 제대로 해야만 한다. 여건 안에서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고 우선순위가 높은 건 만사를 재껴 놓고 처리해야만 한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잠을 줄이든지 해서 끝을 봐야 하니 몸이 얼마나 피곤하냔 말이야. 도리어 이런 태도가 나를 무척이나 게으르고 귀찮아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탓에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일 처리의 결과를 보면 깔끔하게 잘 해놨네 하며 나를 아주 반듯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보겠지만 전혀 아니지. 사실 난 진정 뼛속까지 게으르고 귀찮은 사람인 것을.
바쁜 날엔 더하다.
집에는 빨래와 설거지가 쌓인다. 저것들을 얼른 해버려야 하는데 하면서도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무척 더디다. 빨래는 속옷과 수건, 양말과 외출복, 와이셔츠, 이불, 고급 섬유를 분류해서 따로 세탁을 해야 한다. 피부에 직접 닿고 가장 깨끗한 상태여야 하는 속옷과 수건부터 세탁-그다음은 표백제를 사용하는 흰색 셔츠들-다음엔 고급 섬유 울 코스-양말과 외출복들은 한꺼번에 때려 넣고 쾌속 모드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 이불은 맨 마지막으로 세탁기를 돌린다. 내겐 이런 식의 나름대로 정해놓은 순서가 있기 때문에 빨래 분류 작업과 여러 차례의 세탁 행위를 하려고 치면 정말이지 시작부터 끝까지 귀찮다 귀찮아.
빨래가 다 되고 나서 널 때는 또 어떻고. 요즘엔 빨래를 거의 거실에서 건조대에 널고 있는데 널기 전엔 반드시 청소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 된 빨래를 거실에 내려놓기 위해서는 바닥이 깨끗해야지 각종 먼지나 머리카락이 옷에 묻지 않으니 걸레질은 필수이다. 양말은 반드시 짝을 찾아서 나란히 널어주고 남자 양말과 내 양말은 구분되게 위치를 잡는다. 그래야 갤 때 편하고 신속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까. 티셔츠도 탈탈 털어 구김 없이 각을 잡고 두꺼운 건 통풍이 용이한 바깥쪽 위치로, 얇은 건 가운데 위치로 널어야 마르는 속도에 균형이 맞는(기분이 든)다. 다 널고 나면 빨래를 터느라 바닥에 떨어진 먼지들과 실 보푸라기들이 있으니 또다시 청소를 하게 된다. 정말 피곤하고 귀찮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 마음이 그러고 싶은 것을.
설거지도 참 귀찮다. 기름기 있는 건 키친타월로 닦아내고―그 키친타월은 악취를 유발하니까 폐비닐에 밀봉하여 휴지통으로 골인―물기가 없는 한쪽에 포개어 놓고, 양념이 묻은 애들은 물로 한번 끼얹어 색깔을 없앤 다음 포갠다. 밥풀이 붙어있는 밥그릇은 불려야 하니까 물에 담가 놓는데 공간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하여 물에 담글 그릇을 크기대로 포개어 고요하게 잠수시킨다. 수저는 싱크대 바닥에 놓지 못한다. 항상 컵이나 깊은 그릇에 놓고 입이 닿는 부분이 위로 향하게 해야 하고, 쌓여있던 설거지엔 미생물의 번식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 뽀독뽀독 소리가 날 때까지 청량하고 깨끗하게 헹구고 또 헹군다. 세척된 그릇을 건조대에 올려놓을 때도 통풍이 잘 되고 빨리 건조될 수 있도록 크기대로 나란히 세워 틈을 충분히 벌려주고 습해지지 않도록 각도에 주의해야 한다. 사실 설거지만큼은 시작이 귀찮을 뿐이지 끝내고 나면 마치 내가 목욕을 마친 기분으로 상쾌해지는 게 참 좋기는 하다.
청소는, 아 정말 생각만 해도 지친다. 한 가지만 말하자면, 우리 집에서 두어 개를 제외하고 모든 가구는 전부 다리가 달려 공중에 떠 있는 모양이거나 이쪽저쪽으로 옮겨가며 치울 수 있도록 바퀴가 달려 있다. 그래야만 뭉쳐서 돌아다니는 먼지나 동전, 머리카락, 작은 벌레 등을 포함한 이물질들이 숨지 못하게 되고, 내 시야에서 모두 컨트롤되기 때문이다. 어휴, 청소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이미 지쳤다. 그만 써야지.
애초에 어지럽히질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겨울 방학은 이사의 후폭풍으로 말미암아 꼬박 한 달을 집 정리와 수리,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데 시간을 다 썼다. 고 말한다면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려나. 사용한 물건은 반드시 자기 자리로 재깍 원위치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수납이 일관성 있고 일목요연하게 되어 있어야 자기 자리 찾기도 쉬워진다. 그러다 보니 정리를 시작할 때도 한참 구상하고, 사용하면서 동선이나 효율성에 허점이 발견되면 다시 정리를 시작하니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어지르기 시작하면 치우는데 골치가 아프니까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는 물건은 되도록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하루는 지인이 내게 액자로 해놓으면 장식하기 예쁜 그림이라며 1000피스 퍼즐 맞추기를 선물해줬는데 그 마음은 정말 사랑스럽고 고마웠지만 그 물건의 소유 자체가 사실 정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앉은자리에서 다 맞출 자신이 없으면 꺼내보지도 않을 테지만 다 맞춘다 한들 저 것을 장식할 공간은 만들고 싶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포장을 뜯지 않고 어딘가 보관을 해놓는다면 그곳에도 역시나 먼지가 쌓이고 자리를 차지하고 그러겠지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러면서 내게 좋은 것이 항상 남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야. 라며 또 거창하게 인간관계에 대한 단상을 떠올려보며 스트레스를 달래 준 적이 있었다. 아무튼 어지르는 것은 예방이 최선이다.
나도 다른 사람의 방식에 늘 동의하며 살 진 않으니 나도 내 방식을 강요하거나 기대하진 않는다. 때론 함께 있는 사람이 불편해할까 봐 얼마나 쿨하고 털털하게 어지르는지 모른다. 나중에 치우는 데 애를 먹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마저도 내 만족감이니 달게 감당해야 한다. 다만 남한테 맡기지 못해 심신이 피곤할 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나를 이상하게 보는 대표적인 예가 이 집에서 한 명뿐인 나의 가족님이다. 나와 함께 사는 남자는 이런 내게 ‘너 이건 결벽증이야’라고 말하지만, 천만에. 이 정도는 결벽증의 ㄱ자도 시작할 수 없다며 일장 연설과 부연설명으로 그를 이해시키기에 급급하다. ‘너는 어쩌면 군대가 체질에 맞을지도 몰라.’라고 말한다거나, ‘요즘 정리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있던데 네 적성에 맞지 않을까?’하며 보건교사로 잘 살아가고 있는 나의 진로를 다른 쪽으로 몰아간다. 굳이 이걸 정상범위에서 벗어났다고 몰아세우고 싶다면 나는 강박이 있다고 표현을 해보겠다. 그것은 ‘깨끗함‘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잘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박 말이다. 사실 누군가 내 생활을 보거나 내 공간을 본다면 눈에 띄게 말끔하고 가지런하진 않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엔 나만 알 수 있는 내 정성과 내가 세워놓은 기준과 법칙이 늘 스며있기는 하다. 그것들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얻으니 나는 그저 잘 해내고 싶을 뿐이다.
누군가 나를 세심하게 챙겨줄 수 없었기에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혼자 알아서 해결하던 습관이 배었고 나중에 편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잘 해놓는 것이 중요했다. 내일 학교에 늦지 않고 등교하려면 하루 전날 책가방과 복장을 차려놔야 하고, 필요한 물건을 잘 찾아서 준비물을 챙기려면 쓴 물건은 항상 같은자리에 두기와 수납의 체계성이 필요했었다. 꼬꼬마 때부터 집에서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일은 항상 나의 몫이었으니 시간과 노력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한 번 할 때 제대로 해 놓아야 하고, 애초에 어지럽힐 생각일랑 고이 접어서 저 멀리 구름에다 표창으로 던져 꽂아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체득한 것이라 이건 정말 내 몸에 새겨진 성격과 습관이기에 완벽하진 못하지만 내 능력 선에서는 잘 해놓는 것이 나에겐 꽤나 중요하다.(라고 내 성격의 구성을 현상학 및 정신분석적 추리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그럴싸하게 포장해 봅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글쓰기의 귀찮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면, 나는 현재 정말 많은 주제의 글들을 한글 파일로 가둬놓고 출소 일을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가 즐거워 여가시간이 생길 때마다 끄적거려 잔뜩 써놓긴 했지만 이들은 가진 죄가 많아 상당히 성가시고 신경 쓰인다. 누가 죄명을 따지냐에 따라서 가짓수는 한 없이 차이 나겠지만 일단 내 입장에서 따져 본 죄명은 ‘미성숙‘이다. 내용이나 글의 수준이야 일개 취미생활 아마추어 작가가 뭐 대단할 게 있겠냐만은 그래도 심한 미성숙은 출소시키기 위험하다.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라 나 좋자고 시작한 글쓰기이지만 적어도 내게는 구독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제는 나만 보는 일기가 아니니 정성을 들여서 적고 싶다. 정성의 과정이래 봐야 사실 별다른 것은 없다. 개요를 짜고 각 단락마다 글을 적은 후 1차 탈고를 위하여 읽어 내려가면서 지리멸렬한 가지들은 톱질을 시작한다. 그러나 같이 달려있는 이파리 문장들도 함께 잘려 나가야 하니 전체적인 주제가 쥐 파먹은 모양이 될까 싶어 한동안 고민에 빠지게 되고 이러면서 시간은 하염없이 앞장서 걷는 바람에 완성은 더디디 더디다. (발음 참 어렵네요. 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이 문장을 쳐내 버리면 내 심정이 저쪽까지 가서 닿기는 할까. 하는 오지랖이 시작되어 영락없이 애걸복걸 행색으로 개요를 적은 수첩을 들었다 놨다 하고, 글을 썼다 지웠다 하며 고민을 한다. 평소 옷을 입을 때, 화장을 할 때,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내가 늘 지향하는 것은 '너무 멋 부리지 말자'이다. 그 사람의 행동과 표정, 말투와 생각에서 멋이 나오기 때문에 밋밋한 날것이어도 멋은 불가항력적으로 튀어나오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글에다 멋을 부린다면 스스로도 손발이 오그라들며 견디기가 참 힘들 것이고, 더군다나 어설픈 멋 부림은 상대에게 나의 미성숙을 들켜버리기 딱 좋은 장치가 되므로 눈에 거슬리게 야한 치장을 한 문장은 가차 없이 톱질을 해야 한다는 거다. 톱질 후엔 생존시킨 문장들이 추려졌으니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며 정리 정돈을 하다 보면 결국엔 내 글을 외울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고, 하도 읽어서 끝에 가서는 내 글이 너무 지겹고, 지치고, 귀찮아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기까지 한다. 가끔 글을 읽다가 답답하여 정신을 차려보면 읽는 동안 숨을 참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 책을 읽을 때, 문서 작업을 할 때, 좋은 노래를 들을 때, 훌륭한 강의를 들을 때 등 뭔가에 집중을 할 땐 숨을 참는 버릇이 있다. 탈고 작업 때도 그 습관이 그대로 나오니 때로는 내 스스로가 참 웃기기도 하다. 귀찮다면서 뭐가 그렇게 진지한지 말이다.
아무리 멋 부리는걸 질색한다지만 그래도 민낯으로 내보내는 건 부끄럽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맞춤법 검사까지 살뜰히 하여 분칠을 톡톡 두드려 주면 일단락 끝이 나지만 사실 이렇게 해놓고 결국 또 며칠을 묵혀 두게 된다. 글을 쓰는 그 순간엔 나도 나의 글을 자주 읽어 익숙하니까 내용을 다 알아듣고 됐겠지 싶어 안도하겠지만 며칠 뒤에 읽어보면 “너 지금 무슨 말하고 싶은 거니?”라는 질문을 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또다시 톱질과 분칠을 시작하고 만다. 그래서 나는 귀찮고 또 귀찮다. 그래도 끝은 봐야겠지 말이다.
이렇게 나의 글쓰기는 '미성숙'한 죄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성숙함 대신 '숙성'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래서 발행이 게으르고 한참이나 굼뜨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글의 미성숙함은 내 능력치의 바깥이니 욕심내지 않겠다. 내놓은 결과물이 석연치 않고 어설프지만 정직한 ‘나의 글’이기만 하다면 나는 만족스러워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숙성의 나날들이 지나고 있지만 말이지. 하며 갖은 핑계로 한 번 더 치장을 해준다. 하하.
그러니까 오늘 떠드는 잡생각이 결국 무어냐면.
잘하고 싶은 욕심에 무엇 하나 시작하기가 굼뜬다는 거다. 적어도 최선을 다한 결과가 스스로 보기에 '네 능력 수준에선 이만하면 애썼다' 정도는 돼야 하는데, 잘 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 눈에 보이니 욕심만 하늘 높이 치솟아 시작도 하기 전부터 나는 너무 지치고, 마음을 먹기 위해 살살 달래야 하고, 체력을 만들어야 하니까 이게 상당히 귀찮다는 말이었다. 귀찮고 게으른 내 심정에 대한 일종의 하소연 내지는 변호랄까.
아, 그렇지. 화분.
화분은 아무래도 너무 심했다 싶은 건 나도 동의한다. 3년상은 치렀으니 이젠 기필코 행동으로 옮겨야겠지. 더 이상의 핑계는 나머지 내 모든 귀찮음에 대한 핑계들을 초라하게 만들 테니 화분만큼은 당장 버려야겠다.
나 지금 버리러 간다. 기다려라 화분아.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늘 룰루랄라 글을 쓰지만 민낯이 부끄러워 숙성과 분칠을 하느라 더딘 것이니 너그럽게 지켜봐 주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