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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ve bin Aug 18. 2020

꼬마 할머니

   언젠가 진화론적으로 노인들을 보살피는 인간의 행동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본 기억이 난다. 진화론적으로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자원을 쟁취하고 한정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나눠야 한다. 그 자원은 생산성이 높은 여성, 아이, 젊은 남성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역사적으로 예전부터 노인들과 함께 살고, 노인들을 배려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연장자들은 물질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행동으로 돌려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를 보러 갈 때면, 할머니가 사시는 역 주변을 세심히 살피게 된다. 내가 찾아간다고 미리 전화를 드리면, 꼭 마중을 나오시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파트 4층 난간에서 머리를 빼꼼 내미신 채로 나를 찾고 계신다. 할머니 집은 지하철 역에서 10분이 조금 넘는 거리다. 한 번은 역에서 내리는데 꽤 노령의 할머니께서 서 계신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냥 지나칠 뻔했다. 90이 넘으셨고, 다리가 아프셔서 서 있는 것도 힘드시다고 했는데, 설마 우리 할머니는 아니겠지, 했기 때문이다. 근데 (화가 나게도) 우리 할머니셨다. 할머니께서는 손녀가 온다고 하시니까 버선발로 멀리까지 나오신 거였지만 나는 감사하면서도 화가 났다. 아프다고 했으면서, 왜 괜히 무리해서 여기까지 오셨는지.. 어쨌든 지팡이 끝 부분처럼 완전히 휜 허리를 잡으시며, 아주 천천히, 내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할머니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화가 잠시 났더라도, 할머니와 대화를 하다 보면 할머니가 귀여워서 웃음이 배시시 나면서 화가 풀린다. 밥맛이 없다고 하셨으면서 내가 온다고 하니까 정성스레 만드신 것 같은 김치볶음밥이 있었다. 엄청 맛있어는데도, 계속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달라고 하시는 것도 귀여우시다. 또 빨간색의 조금은 화려한 무니의 고운 옷을 입으신 할머니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물론 할머니께서 다리가 많이 아프시기에 청소가 깔끔하진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땀에 절어(?) 있었지만 더운 김에 바로 청소를 시작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밀린 설거지가 있으면 하고, 먼지가 쌓인 선반을 닦는 일들이다. 또 음식쓰레기를 버리고 오기도 한다. 신기한 것은 찜통 날씨에 청소를 했는데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는 거다.


   할머니한테 고마운 게 많다. 내가 평소면 귀찮아했을 법한 일들을 기분 좋게 하게 해 주시고, 하루하루 살아감에 감사함을 느끼게 해 주신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침구 정리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는 습관이 있다. 습관이 되어버려 힘들지는 않지만 더울 때는 쫌 짜증이 날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근데 할머니와 같이 있으면 그냥 내가 깨끗하게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 짜증은커녕 기분이 좋아진다. 괜히 일을 찾아서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할머니의 수고를 하나라도 더 덜어주면 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또 요즘은 특히나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할머니를 만나는 날이면 하루가 특별해진다. (다리가 아프시긴 해도) 건강하게 살아계신 할머니를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고, 암과 같이 흔하지만 고통스러운 질병을 겪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인생이 정말 빨리 지나간다며 예전 시절 얘기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알차게 행복하게 보내야겠다는 강한 동기가 뿜 뿜(?) 하기도 한다.


   사실 할머니를 나약하기만 하신 것처럼 표현됐지만, 역시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구나 싶은 것들도 많다. 할머니는 소화가 안될 때, 열이 날 때, 특정 맛을 내고 싶을 때, 고민이 있을 때 모든 해답을 제시해주신다. 언젠가 나는 왜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없냐고 다 싫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근데 할머니께서는 그렇게 싫어하지 말고 그냥 모든 사람들한테 호의적으로 대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언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도 중요한 원칙으로 “불평하지 말고 칭찬하라”는 말이 나온다. 인생의 경험치를 쌓아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첫 문단에서 주장했던, 얼핏 보면 진화론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을 몸소 이해하고 느낀다.


   가끔 자기 전에 두려울 때도 있다. 90세가 넘으신 할머니이시기에, 언제 어떻게 될지 불안한 마음이 불쑥 찾아올 때가 있다. 그때마다 다짐한다.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평소에 할머니를 더 귀여워해 드려야지, 우리만의 추억을 많이 간직해놔야지, 특히 취직하면 용돈 많이 드려야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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