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써야 한다는 욕심에서 벗어나기
다독, 다작, 다상량. 이제 너무 많이 들어서 감흥도 없는 '글 잘쓰는' 방법이다. 근데 나는 항상 다작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글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강박(?)때문에 그랬다. 모든 문장이 멋있었으면 좋겠는, 그런 멋진 글을 쓰고 싶었다. 욕심이었다.
주변에도 글을 좋아한다면서도 글을 쓰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털어놓는 친구들이 있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잘 써야 한다는 혹은 잘쓰고 싶다는 압박감을 받기 때문일 것 같다.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이해가 잘 되면서도 화려한 수사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을 닮고 싶었던 것 같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다 보면 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내용이 술술 읽히고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책의 첫 문장부터 압도당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문제는 이처럼 눈을 사로잡는 문장들을 보다 보니 내 문장 하나하나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다. 근데 문제는 이걸 떨쳐내지 않으면 제자리걸음밖에 못한다는 점이다. 최근 이승희 씨의 "기록의 쓸모"라는 책을 봤다. 그분에 대해 관심이 생겨 인터뷰도 찾아봤다. 그분은 평소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시지만, 하신 말씀 중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이거다.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그냥 생각하고 느낀걸 블로그에 기록하다 보니 글을 잘 쓰게 된 것 같다"(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표현해보고 기록하는 게 중요한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기에 무조건 써본다는 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진짜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 때문에 다작을 잘 못해왔는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내가 정말 신경 썼던 것은 남들의 평가였다. 별로 잘 못썼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더 컸다. 다른 사람의 비판, 평가에 대해 좀 덜 무서워하고 덜 영향받을 수 있도록 마음의 맷집이 커져야 한다. ‘저 좀 봐주세요’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저 잘 쓰죠, 잘 났죠?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남 신경을 크게 썼던 것 같다. 페이스북과 인스타 좋아요 수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댓글이 많이 달렸으면 좋겠고. 중요한 것은 남에게 인정받지 않더라도 꿋꿋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나갈 수 있는 맷집을 가진 사람이냐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이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앞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쓰기를 꾸준히 해나갈 것이다. 비록 좋아요 수에 집착은 할 수 있더라도.. 꿋꿋하게 글을 써나가고 싶다.
특히 최근 본 이슬아 작가의 세바시 강연에서 소개된 아이들의 글쓰기를 보고선 솔직히 쫌 충격받았다. 어린아이는 그저 순진하고 뭘 모르니까 초보적인 수준의 글만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이들의 글쓰기에서 생각한 것을 솔직하게 느낀 것을 순전히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느낌, 그래서 더 매력 있는 글을 쓸 수 있구나 싶었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들은 글을 못쓸 것이라는 편견, 오만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지식의 깊이와 글의 깊이는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커갈수록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많아 그만큼 내 생각을 검열하고 수정하고 더 좋게 보이려고 노력한다. 이때부터 글쓰기는 투명하지 않은, 매력 없는 글쓰기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진정한 나를 위한 글쓰기를 시작해야지, 이솔아 작가가 말씀하신 대로 내 삶에서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내 삶을 사랑해야지, 오늘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