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우리는 처음 본 사이였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진학하고 나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관계가 많이 시작됐다. 그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들은 조교 선생님들이다 (학교에선 서로를 보통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이 선생님들과 처음으로 밥을 먹는 자리에서, 한 선생님이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가족이랑 무슨 일이 있나? 남자 친구랑 헤어졌나? 누가 다쳤나? 주식이 곤두박질쳤나? 이런 추측들이 속으로는 난무했지만, 처음 본 사이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작은 목소리로 괜찮냐는 말만 반복하는 것 뿐
조금 진정되고 이유를 들어보니, 같은 팀의 어떤 선생님께서 다른 팀으로 가기로 하셔서 슬펐다고 한다.
그것을 듣고 나서는 나 자신을 성찰했다. 그 둘이 어느 정도의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는지 혹은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나라면, 아쉬운 정도로 끝날 것 같았다. 내가 정이 없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 사람마다 그 포인트가 다른 거겠지? (..)
나는 언제 울음이 나올까? 나의 포인트는 감동을 받는 순간인 것 같다. '나라면 하지 못했을 텐데,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들거나, '해당 결과에 대해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그 시간들이 예측이 되고 그것에 내 기준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가령 역사 시간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님, 독립운동가이신 이 분은 조선시대 사람이시다. 이 분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신 분이시다. 소위 엘리트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600억 원이 넘는, 땅 값으로 치면 2억이 넘는 아주 큰 액수를 다 팔고 일생동안 독립운동가를 후원했다. 역사시간에 선생님이 해준 얘기에 따르면, 일생 후기에는 먹을 돈이 없어 구궐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안위보다 독립운동가의 후원에 목을 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조선총독부가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돈을 주면서 독립운동가를 폄훼하고, 모른척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하는 그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그 결정은 더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분의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감사함과, 나라면 하지 못했을 일이라는 죄송함과.. 그분이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의 그 과정과.. 나중에 돈이 없어서 생황이 힘들었을 그 상황까지 모든 게 다 스쳐 지나갔다.
이회영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었는데, 우당 이회영 선생님은 넷째였다.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망명을 주도했기에 조금 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다른 형제들도 각자의 그 많은 재산을 헐값으로 처분하고(일제의 눈을 피해 몰래, 빨리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망명했는데, 이 중 둘째 이석영 선생도 전 재산을 조국에 바쳤고 인생의 끝자락에는 중국 상하이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들이 제공한 것은 독립운동의 물질적 기반이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 기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다들 특이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정의롭고 희생하는 것 그리고 무언가 성취하는 것에 감동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과거의 역사를 찾는다. 살아가다가 잊게 되는 깊은 감사함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