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심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을 시작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나의 세계를 오픈해 상대방의 세계와 접점이 생기고 서로의 공간을 어느 정도 열어두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카톡 친구는 38명이며, 숨긴 친구는 460명이고, 차단한 친구는 28명이다. 결과적으로 알게 된 사람들 중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7%가 조금 넘을 뿐이다. 이들과도 가늘고 긴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 숨김 친구 목록에는 가깝지 않은 친구와 비즈니스 관계인 사람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차단은 더 이상 연락하거나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속해있다.
내 머릿속으로는 관계의 유형이 이렇게 나뉜다.
범주 1. 알게 된 사람 - 비즈니스(필요해서 알고 지내는) 관계 - 친구 - 친한 친구
범주 2. 남자 친구
범주3. 가족
기본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학교 구둣방 아저씨, 광화문에서 혼자 부채를 파시는 아저씨, 면접을 같이 본 언니, 나처럼 클라이밍을 혼자 하던 분처럼 의외의 장소에서 처음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번호를 교환하고 개인적인 약속을 잡는 것은 아니기에 나와 관계를 맺었다는 표현보다는 그저 '좋게 스쳐지나간 사람', 즉 범주 1에 들어갈 것이다.
다음은 나와 몇 번 이상 보며 얼굴을 익히고 대화를 조금 더 많이 해 본 이들과의 관계다. 이들은 친구로 발전될 가능성이 크다. 아는 사람과 친구의 구분점은 '감정의 교류를 하고 싶은가'이다. 아는 사람은 감정을 뺀 담백한 얘기만 하게 되는 관계라면, 친구는 서로의 일과 감정에 관심이 있고, 공감을 해주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관계다.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서로 찡얼대기도 하지만, 그게 밉지 않은 그런 관계.
교류가 잦으며, 단순한 공감 이상 적극적 공감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가까운 관계'라는 것이 성립한다. 그냥 친구가 서로의 감정을 동등하게, 비슷한 범주로 나누는 사이라면 친한 친구는 적극적 공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며 서로의 관심사를 자주 공유한다. 또 만났을 때 마음이 편하다. '꾸밈'이 없다. 마음이 편한 이유는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또 더 친밀하기에 기대하는 것들이 있어진다. 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줄 거라는 기대나 내 편이 돼줄 거라는 기대.
비즈니스 관계라고 표현한 관계는, 내 학업과 일과 관련된 관계다. 친밀하진 않지만 자주 봐야 하는,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할 의무가 주어진 관계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감정 교류는 거의 없는 담백한 관계를 지향한다. (친한) 친구이자 비즈니스 관계인 이중 관계가 있을 수는 있지만 먼저 비즈니스 관계였다면 친구가 되긴 어렵지 않을까? 그렇지만 대학원을 들어와서 만난 이들과 많이 친해진 덕에 지금은 그들과 친한 친구가 된 것 같다 (...)
이성관계는 남자 친구와 남자 사람 친구로 나뉠 수 있다. 남자 친구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인 동시에 나를 가장 지지해 주는 사람이다. 가장 편하고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친구와는 기본적으로 'give and take'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가 남자 친구다. 좋은건 가장 먼저 말하고 싶고 좋은 것을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나에게 남자 사람 친구는 여자 사람 친구와 특별히 다를 게 없다.
부모님과의 관계는 가장 가까운 관계면서 영향을 받을래야 받지 않을 수 없는 관계다. 지나치게 의존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간섭하기도 하고 나쁜 점을 제대로 지적해줄 수 있는 유일한 관계이기도 하다.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사실은 조금 놀랐다. 나는 나름 너그럽고 호의적인 사람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모두 다 잘 지내고 있는 사회성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넘기 힘든 벽들이 있고, 그 안에는 책장 속 파일처럼 관계별로 정리정돈이 다 되어 있었다.
이처럼 관계의 형태에 따라서 친밀함, 기대감, 의무감의 정도가 다르다. 다만 내가 맺는 모든 관계에서 중시하는 것이 있다. 함께 하는 순간은 서로에게 몰입하고 진심인 관계를 지향한다.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눠보는 사람과는 친밀감도 의무감도 기대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의 찰나라도 서로에게 진심인 관계를 원한다. 길을 알려줄 때도 나는 최선을 다해 알려준다. 지나칠 순간의 인연이지만 대화를 하게 된 이 순간을 즐기면서.. 나는 진심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나를 보면서 ‘이런 말까지 하게 되네’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의 진심이 통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의 한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