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이미 결정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민의 팔 할은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지 않는 것에서 온다. 자주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수동적인 삶은 왠지 억울하게 느껴진다.
무엇이든 좋으니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에게 끌리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에 대해서 바꿀 수 없이 이미 다 정해져 있었으면 좋겠다. 이미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불만이나 미련도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면서도 자주성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모순적이지만, 매 순간 선택을 하는 것에 고뇌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렇게 부당하다고 생각되는(그 당시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이렇게 표현했다) 신분제 사회를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굳게 믿었던 시대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지 조금의 선택권은 있지만 절대 넘을 수 없는 천장이 있었다. 일종의 상한선이 뚜렷하게 있기에 그 이상을 꿈꾸는 이는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드물었다. 또 그 이상을 꿈꿨다가 좌절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명문가 자제들도 신분제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 벽이 얼마나 견고했는지, 어쩌면 당연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그 벽은 서서히 깨졌지만.
어디선가 '선택의 역설'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선택권이 많아지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너무 많은 선택권은 우리를 행복하지 않게 만든다는 내용이다. 특히 물건의 질이 상향 평준화된 지금에서 많은 선택은 아주 미세한 차이를 가려내야 한다는 그 압박감을 심화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괜찮은 선택지들이 많은 것은 우리를 꼭 행복하게 해주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