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ve bin Jul 19. 2021

착함이 독이 되는 사회

착하다, 상냥하다, 공손하다, 순수하다.


 말들이 듣기 싫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웃는다고, 착하다고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웃는다고, 착하다고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닌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 ‘착한 사람 네이버에 치면 ‘착한 사람 그만두기’ ‘착한 사람 콤플렉스 상단에 뜨는 것은 착한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착함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인식했다는 것을 일부분 보여준다.


20살 초반, 처음 사회생활을 했다. 까칠하고 웃음기가 많지 않은 A와 나는 같이 인턴에 뽑혔다. 잘 웃고 소위 사람 좋은 나와 그렇지 않은 A에게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 기억이 난다. 참 미묘한 지점이라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그것이 선배든 상사든 A에게 조금 더 조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으로서는 나를 더 좋고 편하게 생각하지만 조금은 만만한, 그런 느낌.


(?) 틀린 것만 같지는 않다. 어떤 모임을 가든 내가 듣는 단골 멘트가 있다. 나의 롤링페이퍼에는 항상 따뜻함을 느낄  있었던 사람이라고 고마웠다고 적혀있다. 내가 남들에게 그렇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그것을 항상 똑같이 보답하려고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없다 사실이다. 애초에 같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지만, 결국 착함이 소위 말하는 호구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턴들끼리 얘기를 할 때에도 이런 지점이 있었다. ‘저 선배는 봐주겠지’ ‘조금 지각해도 주겠지, 조금 대충 해도 괜찮겠지’ 반대로 아주 무섭고 쌀쌀맞은 상사한테는 - 적어도 된통 혼날까  - 항상 긴장을 하고 있고 항상 혼나지 않으려고 인턴들도 안간힘을 쓰곤 . 심지어 더 억울(?) 부분은, 착하고  웃는 사람보다 조금  착하고   웃는 사람이 조금  능력 있어 이는 이미지를 갖는 것이 흔하다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언젠가부터 나는 착하다, 상냥하다, 공손하다, 순수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나의 취약점을 들킨  마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특징은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할  있는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미 만들어진 성격을 조금씩 뾰족하게 다듬는 것이 당연한  같으면서도, 착함과 상냥함 그리고 공손함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데,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따뜻하고  착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답답하고 아이러니하다.


모든 사람이 계산하는  없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한다면, 나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도 문제없지 않을까, 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상상하며 이상주의자가 되면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아무리 이런 마음을 먹어도 한계는 분명 있다. 이미 성향 자체가 따뜻한 사람이면 그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28년간 살아오면서 굳어진 성향이다. 남이 좋아하는  보면 나도 기분 좋고, 남이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는다면 거기서 나도 행복함을 느낀다.


다만,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의 모습을 꾸밈없이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 내 모습 그대로 배려하고 자상하고 착하고 순수하게 다가가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줘도 깝지 않은  사람들이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