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믿으며 살아간다.
그게 신이든, 과학이든, 운명이든, 혹은 자신이든.
누군가에겐 그것이 곧 ‘종교’일 테고,
누군가에겐 ‘의미’나 ‘태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가톨릭 신자다.
하지만 이 고백은 나의 절대적 믿음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묻고 싶다.
2025년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여전히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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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자리에 남은 것들
어릴 적엔 누구나 하나쯤의 종교를 가졌다.
성당, 교회, 절—무엇이 되었든,
우리의 삶에 종교는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주일 아침,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성당에 들어서면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정갈한 공기 속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감각을 배워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 인구 절반 이상이 ‘무종교’라고 답했다.
특히 10대, 20대는 무려 70% 이상이 종교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차라리 매일의 경험과 합리, 감정과 감각으로
현실을 밀도 있게 살아가고자 한다.
그건 절망의 징조일까, 아니면 성숙의 증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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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구조 속에서 마주한 불완전한 인간들
종교는 겉으로 보기엔 참 평화롭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성당은 고요하고 아름답고,
미사는 일주일에 한 번이면 족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마음의 안정을 얻고,
조용히 ‘신’ 앞에 나를 내려놓는다.
문제는 그 거리감이 가까워질 때 발생한다.
미사에 자주 나가고,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고,
봉사로 누군가를 마주하고,
관계가 엮이고, 시선이 얽히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신’만을 향하지 않는다.
그 안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어긋남이 있다.
나는 신을 믿으려 성당에 갔지만,
종종 인간에 실망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험담하고,
묵주를 돌리는 손끝에서 차가운 말이 쏟아지면,
나는 조용히 물러서게 된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느님만 보세요.”
신부님들의 이 말은 진심이다.
그러나 말처럼 쉽진 않다.
신을 향한 길 위엔 늘 사람이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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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을 믿지만, 맹신하지 않는다
종교는 이상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이상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는다.
종교가 말하는 모든 윤리, 모든 규율, 모든 세계관에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진 않는다.
가톨릭은 아직 여성 신부가 없다.
여성 교황도 없다.
나는 그 전통의 이유를 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현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변화를 두려워한 채 과거에만 머문다면
그 믿음은 언젠가 경직된 구조가 될 것이다.
나는 신을 사랑하지만,
종교가 만든 벽을 사랑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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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없는 이들을, 나는 존중한다
신이 없다고 해서 공허한 것은 아니다.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덜 진실한 것도 아니다.
신을 갖지 않은 이들은 어쩌면
스스로의 철학과 책임감을 더 뚜렷하게 안고 사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믿음은 꼭 신의 이름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믿는 것, 삶을 믿는 것,
어떤 하루의 가치를 믿는 것도
그 자체로 종교이며 기도이며 믿음일 수 있다.
그러니 종교가 없는 이들을
나는 존중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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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종교는 하나의 ‘역사’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성당을 다녔다.
그곳의 조용한 공기와 묵주 소리가 좋았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가톨릭을 스스로 다시 공부하게 되면서
나는 종교를 ‘역사’로 보기 시작했다.
이벽 선생이 혹한의 산을 넘고,
호랑이의 위협을 뚫고 천주실의를 전했던 이야기.
정약용과 그 형제들이 새로 들은 가르침 앞에서
기존의 세계를 다시 정립하려 애썼던 시간들.
임금의 명을 거스르며 순교를 택했던 선조들의 절박한 진심.
나는 그 뜨거운 기록들을,
신앙 이전에 ‘사람의 삶’으로 읽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용기와
정신의 깊이로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종교는 내게 ‘신’을 말하는 동시에,
사람의 철학을 말하고,
한 시대를 관통한 정신의 구조로 남아 있다.
그 믿음은 기도보다 더 묵직하게 나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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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사라지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까
나는 종종,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AI가 사람의 감정과 질문을 이해하고,
신의 자리를 기술이 대신하게 되는 시대.
인공지능이 기도를 대신 쓰고,
사람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척’ 하는 미래.
그때에도 종교는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게 될까?
어쩌면 신이 사라지는 시대는
인간이 더는 질문하지 않게 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지 않게 될 때,
종교는 그 역할을 다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종교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묻고 생각해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왜,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되었는가.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신의 이름이든, 나의 이름이든,
그 안에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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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다.
하지만 더는 “다 믿고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이해한 만큼만 믿는다.
내가 겪은 만큼만 따르고,
내가 지킬 수 있는 만큼만 신 앞에 서 있다.
신이 아니라 사람을 본다.
교리를 외우기보다, 그 안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래서 내 믿음은 아직도 고민 중이다.
흔들리는 믿음도 믿음이라고,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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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 삶의 깊은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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