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피해 아동의 사각지대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도 몰랐어요."

by 유다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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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직 대한민국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인이를 잊을 수 없다.

서울 양천구의 한 아파트에서, 16개월의 작은 생명이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되던 날.

입양된 지 8개월, 그 시간 동안 아이는 여러 번 신호를 보냈다.

멍이 든 팔, 퀭한 눈빛, 잘 먹지 못하던 입.

병원을 찾았던 의사도, 어린이집 선생님도, 이웃도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신호들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가정사니까’, ‘부모도 힘들겠지’라는 말속에 묻혀버렸다.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낸 울음소리는, 신고서 한 장으로만 남았다.

그 후로도 수많은 정인이가 있었다.


2022년, 전남 완도의 바다에서 발견된 차량 안에는 열 살 조유나 양과 부모의 시신이 있었다.

“제주도 한 달 살기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떠난 그 여행은, 사실상 생의 종착역이었다.

CCTV에 잡힌 마지막 장면은 축 늘어진 아이를 업은 엄마의 뒷모습이었다.

한때 꿈꾸던 ‘가족의 행복’은 경제적 절망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고요하게 바다로 가라앉았다.

그 사이에도 화장실에 묶인 채 구조된 일곱 살 아이, 계모의 학대 끝에 세상을 떠난 초등학생,

친부의 폭행으로 숨진 세 살 아기… 언론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동학대 사건”, “○○양 사망 사건”,

그저 또 하나의 ‘비극’이라는 단어로만 덮였다. 한국은 경제적으론 선진국이 되었지만,

아동학대 문제만큼은 여전히 후진국의 그림자 속에 있다.

아이들은 어른의 분노를 감내하고, 어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채,

세상에 오지 않았어야 할 폭력의 대가로 삶을 잃는다.

정인이는 태어나자마자 ‘실패한 입양 시스템’의 피해자가 되었고,

유나 양은 ‘경제 절망 사회’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아이들은

오늘도 ‘조용한 폭력’ 속에서 울고 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아이는 소리치지 않는다. 그 대신 행동으로 말한다 —

눈을 피하거나, 이유 없이 울거나, 몸을 움츠리거나, 갑자기 말을 잃는 방식으로.

그건 분명한 구조 요청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 신호를 모른 척했다.

“요즘 애들이 예민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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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았지만 외면한 어른들


정인이 사건 이후, 세상은 크게 분노했다. 그 분노는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거리의 촛불로,

그리고 ‘정인이 법’이라는 이름의 법률로 이어졌다.
2021년 3월 23일,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내용은 이랬다. 아동학대 신고가 들어오면 즉시 아동을 분리 보호할 수 있도록 하고,
학대 가해자에게는 더 무거운 형을 내리도록 했다. 의사, 교사, 사회복지사 등 신고 의무자의 책임도 강화되었다. 법은 생겼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아이는 죽은 뒤에야 보호받는다.”
아동학대 전담공무원 1명이 관리해야 하는 아이는 평균 100명 이상.
현장 대응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신고가 접수되어도 “증거 불충분”, “부모의 설명이 일관됨” 같은 이유로
아이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간다.
많은 공무원들은 정인이 사건 이후 “아이를 분리했다가 오히려 부모에게 고소당한”
사례들을 떠올리며, 손을 멈춘다. ‘분리’는 종종 또 다른 폭력으로 오해된다.


“부모의 양육권을 침해한다.”
“국가가 가정에 과도하게 개입한다.”


그 문장 뒤에서 또 하나의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오히려 ‘가족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흔들린다. 신고자는 불이익을 우려해 침묵하고,
경찰은 소극적으로 현장을 방문한다. 그리고 아이는, 결국 죽는다.
구조 요청은 늘 늦게 도착한다. 그것은 단순히 제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부모의 권리’를 ‘아이의 생명보다 앞세우는 문화’를 버리지 못했다.
폭력을 행사한 부모가 “훈육이었다”라고 말하면, 그 한마디가 법정에서 변명이 된다.
“부모의 자녀교육권”이라는 말이 아이의 생존권을 침묵시킨다.

어른들이 아이의 고통을 외면할 때, 그건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동조’다.
우리가 침묵하는 동안 또 다른 아이가 욕조에서, 차 안에서, 혹은 방 안 구석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그런 부모 밑에 태어난 게 불행이지.”
그 말은 틀렸다. 태어난 게 불행한 게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어른들이 침묵한 게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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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스템의 벽과 현실의 구멍


정인이 사건 이후, 아동학대 대응 체계는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각 지방자치단체에는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이 배치되었고, 경찰청에는 ‘아동학대 사건 전담 수사팀’이 신설되었다. 2021년 3월 이후로만 보면, 표면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아동 보호 시스템을 구축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현장은 전혀 다르다.

서울의 한 구청 아동학대 담당자는 하루 평균 15건 이상의 신고를 처리한다.

그중 절반 이상은 “가정 내 문제”로 분류되어 초기 조치만 취한 뒤, 다시 원가정으로 되돌아간다.
“일시 분리”라는 제도는 존재하지만, 아동을 즉시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 경기, 부산을 제외한 지방 중 상당수 지역에는 24시간 아동 쉼터가 단 한 곳뿐이다.
그마저도 만원이다. 한 아이가 신고된 날 밤, 담당 공무원은 경찰과 함께 그 집으로 출동한다.

문을 두드리면 부모는 문을 잠근다.
“애 자고 있어요. 내일 오세요.” 그때 돌아서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현행법상, ‘긴급구조 사유’로 인정받지 못하면 강제로 문을 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이, 그 아이는 다음 날 아침 뉴스의 숫자가 된다.

2023년 한 해 동안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5만 6,000건을 넘겼다.
그중 실제 ‘아동학대 범죄’로 인정된 건 3만 4,000여 건. 하지만 실질적 분리보호 비율은 15% 미만이다.
즉, 열 명의 피해 아동 중 여덟 명 이상은 학대를 당한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의 아동보호 체계는 아직 ‘응급조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즉, 아이가 이미 피해를 입은 뒤에야 움직인다.
예방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있다. 그 이유는 복잡하다.


첫째, 예산의 문제.
아동학대 전담 인력은 공무원 조직 내에서도 가장 과중한 업무를 맡지만,
그에 비해 급여와 인력 지원은 턱없이 적다.


둘째, 제도의 모순.
아이를 분리하려면 법적 근거가 필요하고,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동학대는 대개 폐쇄적 공간, 즉 ‘집’ 안에서 발생한다.
증거는 숨겨지고, 아이의 진술은 왜곡된다.


셋째, 사회적 인식.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부모의 체벌권”을 교육의 한 방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2022년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아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체벌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전체 부모의 36%에 달했다.
아이를 때리면서도 “사랑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현실, 그건 법보다 더 단단한 벽이다.


넷째, 이웃과 지역의 침묵.


아이가 밤마다 우는 소리를 듣고도, 그 집 앞을 스쳐가며 모른 척하는 사람들.
“괜히 얽히면 나만 손해야.”
그 말 한마디가 수많은 아이의 구조 신호를 끊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는 오늘도 조용히 아이들을 죽인다.

정인은 의료진의 손에서 떠났고, 유나는 바닷속으로 사라졌고, 또 다른 아이는 문 뒤에서,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시스템’은 있다. 그러나 ‘실행’은 없다. ‘매뉴얼’은 존재한다. 그러나 ‘감각’은 없다.

법과 제도만으로는 한 아이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다는 걸, 우린 이미 너무 많은 죽음으로 배웠다.


4. 아이들이 남긴 그림자-살아 남았다는 이유로 잊혀진 아이들


학대를 견디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운아’로 불린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구원받지 못한 채, 늘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서 흔들린다.

쉼터에 머물던 아이들은 처음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몸을 움찔한다.
낯선 어른이 다가오면 무조건 사과부터 한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 말은 생존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아직도 자신이 ‘맞을 만한 존재’였다고 믿는다.

트라우마는 신체보다 마음에 오래 남는다. 한 아동상담사는 이렇게 말했다.
“학대를 겪은 아이들은 물리적 폭력보다 사랑을 빙자한 언어적 폭력에 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엄마가 널 사랑해서 그래’, ‘말 안 들으니까 맞는 거야’ 같은 말이
그들의 정체성을 무너뜨립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학대를 경험한 아동의 65% 이상이 성인이 된 후 불안 장애, 우울증, 자해 충동, 대인기피증을 겪는다. 그중 일부는 ‘학대의 대물림’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당했던 방식을 ‘사랑의 표현’으로 착각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한 17살 소녀의 상담 기록에는 이런 문장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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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맞을 때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왜냐면, 나한테 관심을 주는 순간은 그때뿐이었으니까.”


그 문장은 한 사람의 병리 기록이 아니라, 이 사회의 고백문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된다. 그러나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사랑을 주거나 받는 법을 두려워한다.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가장 위험한 장소이자, 가장 그리운 곳이다.

“가정은 보호의 울타리여야 한다.” 우리가 수없이 되뇌는 말이다.
하지만 그 울타리 안이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감옥이자 형벌이었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이웃의 웃음소리, 학교에서 보는 친구들의 도시락, 엄마 손 잡은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매일 ‘나만 이상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학대 후유증은 심리뿐 아니라 교육의 단절로도 이어진다.

2018년 이후, 전국 보호시설에 입소한 아동 중 약 60%가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들은 사회로 돌아오는 문을 잃었다. 자립 프로그램은 존재하지만, ‘정신적 회복’을 다루는 제도는 거의 없다. 정부는 해마다 예산을 늘리고, 보호시설을 확대한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시설의 개수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의 사람이다. 따뜻한 시선, 꾸준한 대화, 신뢰의 축적.
그것이 아이를 다시 사회로 이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눈빛이 늘 멀리 가 있다. 웃음이 어색하다. “괜찮아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 말은 “아직 아파요”의 다른 형태였다. 아이들은 대체로 울지 않는다.

이미 울음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몸이 말한다. 자해 흔적, 야식 강박, 과잉 반응, 무표정.
그건 전부, 구조 신호다. 그 신호를 읽을 줄 아는 어른은 많지 않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잊힌 아이들. 그 아이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학교 복도 끝자리의 조용한 학생으로, 혹은 SNS에 ‘괜찮다’는 문장을 매일 올리는 청년으로. 그들이 아직도 세상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우리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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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가 외면한 구조― 제도, 사회, 그리고 책임의 경계


정인이가 죽은 뒤, 대한민국은 울었다. 유나가 바다로 사라진 뒤에도 울었다.
뉴스에 나오는 아이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댓글창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이라는 문장이 달렸다.
그러나 그 문장은 매번 복사되듯 반복된다. 우리는 울었지만, 변하지 않았다.

울음이 변화를 만들지 못하는 사회. 그건 제도의 문제이자, 문화의 문제이며,
결국은 책임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구조의 문제다.


1) ‘누가’의 문제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가해자’를 찾고, 대중은 ‘분노의 화살’을 쏜다.
그러나 가해자는 언제나 한 명이 아니다. 그 폭력에는 방조자들이 있다.

신고를 망설인 교사, 이웃의 울음을 외면한 사람, 형식적인 조사만 남긴 공무원,
제도를 만들어놓고 감시하지 않은 정치인. 정인은 입양 직후 여러 번의 병원 진료 기록이 남았다.

의료진은 멍의 위치와 패턴이 “이상하다”라고 느꼈다. 하지만 의료기관의 ‘신고 의무’는 “확신이 있을 경우”에만 강제된다는 모호한 조항 때문에 그 신고는 접수되지 않았다.

그 한 줄의 모호함이 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부모는 수감되고, 담당 공무원은 전보되며, 언론은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사건을 쫓는다.
그러나 ‘시스템’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비극을 다시 바라본다.


2) ‘어디서’의 문제


대한민국의 아동학대 대응 체계는 “사건 중심, 대응형”으로 설계되어 있다.
즉, 학대가 일어난 ‘이후’에만 작동한다. 예방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일’로 간주된다.

학교의 상담 예산은 줄어들고, 보호기관의 예산은 긴급사건 위주로만 편성된다.
결국 아이는 ‘죽거나 다쳐야’ 비로소 시스템 안으로 들어온다.

영국은 1989년 제정된 「Children Act」 이후 아동학대를 ‘범죄’가 아닌 ‘사회적 위험 신호’로 인식했다.

즉, 아이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증거가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분리 보호가 가능하다.
이후 부모의 양육권은 가정 재건 프로그램을 통해 단계적으로 회복된다.

반면, 한국은 “가족의 회복보다 가족의 체면”을 우선한다.
분리보호는 ‘가정 파괴’로 여겨지고, 학대 신고는 ‘이웃 고발’로 오해된다.
결국 ‘공동체의 눈치’가 한 아이의 생명을 좌우하는 셈이다.


3) ‘왜’의 문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아이를 보호의 대상이 아닌 소유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내 자식은 내가 알아서 한다.” 이 말은 오랜 시간 가정폭력의 면죄부가 되어왔다.

부모의 권리와 아이의 권리가 충돌할 때, 한국 사회는 거의 언제나 부모의 손을 들어준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아직도 우리는 ‘아이’를 ‘온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독립된 존재다. 그들의 감정, 공포, 욕구, 고통은
어른의 판단 아래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의 일’이라는 이유로 개입을 주저한다.

공무원은 법적 근거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이웃은 ‘괜히 나섰다가 오해받을까’라는 이유로,
학교는 ‘학부모 민원’이 두려워서, 그렇게 모두가 물러서 있을 때, 아이의 구조 신호는 공중에 흩어진다.


4) ‘어떻게’의 문제


제도가 존재해도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시스템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은 약 1,700명.
한 명이 관리해야 하는 학대 의심 아동은 평균 120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계약직이며, 정신적 소진율은 공무원 중에서도 가장 높다. 연 1회 이상 사직하는 비율은 40%를 넘는다.

이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과 ‘즉각적 대응’을 기대하는 건 잔인한 일이다.
그들은 매일같이 트라우마를 목격하고, 그럼에도 휴식 없이 다음 사건 현장으로 달려간다.

국가가 이들을 ‘제도적 영웅’으로 소비하는 동안, 그들의 소진은 곧 시스템의 무력함으로 돌아온다.


5) ‘누가 책임지는가’


결국, 이 모든 질문은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누가 아이의 생명을 책임지는가?”

가정인가, 사회인가, 국가인가. 이 질문 앞에서 모두가 한 발 물러선다.

가정은 “우리 문제”라 말하고, 사회는 “정책의 한계”를 말하며, 국가는 “예산과 권한”의 부족을 말한다.

그 사이, 아이는 또 죽는다. 책임은 공중에 떠 있고, 그 누구도 죄책감을 오래 가져가지 않는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한 아이의 생명은 한 사회의 윤리 전체를 드러내는 척도다.
아동학대는 ‘누군가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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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가 바꿔야 할 것들― 사회의 감수성, 개인의 책임, 그리고 희망의 가능성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감정을 흉내 내고, 로봇은 눈빛을 읽는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눈앞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아이의 울음에 고개를 돌리고, 이웃의 이상한 기척에 문을 닫는다.
SNS에는 수많은 공감 문장들이 떠다니지만, 정작 실제 현장에서는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의 퇴화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법 개정’이 아니라 ‘공감의 회복’ 일지도 모른다.


1) 사회의 감수성: 듣는 능력을 되찾는 일


어른들이 귀를 닫으면, 아이는 울음을 멈춘다.
그러나 울음을 멈췄다고 해서 고통이 끝난 건 아니다. 그건 단지 ‘포기’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 사회는 ‘소리 큰 문제’에는 즉각 반응하면서도, ‘조용한 고통’에는 무관심하다.
정치적 사건엔 논쟁이 붙지만, 한 아이의 구조 요청엔 ‘좋아요’ 몇 개로 끝난다.

이제는 반대로 해야 한다. 큰소리보다 작은 신호를 들어야 한다.
‘좋아요’ 대신 신고를 눌러야 한다. “내 일이 아니야”라는 말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로 바꿔야 한다.

공감은 기술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훈련되어야 한다.


2) 개인의 책임: 어른으로 산다는 것


우린 모두 어른이 된다. 하지만 ‘어른답게 산다’는 건 나이가 드는 것과는 다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돌볼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뜻이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우린 모두 누군가의 보호자일 수 있다.
버스 안에서 아이의 울음에 짜증 대신 미소를 보이고, 이웃집의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 작은 일들이 사회의 면역력을 만든다. “나는 바쁜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 말이 바로 무력의 시작이다. 어른의 무력은 아이의 위험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한 번쯤 멈춰 서서 주변을 보자.
가로등 아래 혼자 서 있는 아이, 학교 앞 벤치에 오랜 시간 앉아 있는 아이,
그 아이에게 “괜찮니?”라고 한마디 건네는 일, 그게 사회 변화의 첫 문장이다.


3) 제도의 방향: 보호에서 회복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보호’에만 집중해 왔다. 하지만 보호는 일시적이고, 회복은 평생이 필요하다.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은 안전한 환경보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원한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정부는 단순한 ‘구조’에서 ‘회복’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쉼터를 늘리는 것보다, 그 아이에게 다가올 한 명의 진심 어린 어른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아이 한 명을 구하는 데 필요한 건, 거대한 제도보다 작은 일관성이다.
“나는 네 편이야.”
그 말을 매일 반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그 아이는 다시 웃을 수 있다.


4) 희망의 가능성


세상은 절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바꿔낸 경험이 있다.

‘정인이 법’은 슬픔에서 시작됐지만, 그 법이 존재함으로써 수백 명의 아이가 구조되었다.
한 선생님의 신고, 한 의사의 메모, 한 이웃의 통화 한 통이 한 생명을 살린다.

그리고 그 구조의 순간마다 한 명의 어른이 있었다.
그 어른이 바로 희망의 증거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거창하지 않다.

모두가 그 한 명이 되는 것이다. 법과 제도는 느리지만, ‘사람의 마음’은 즉각적이다.

공감은 전염된다. 따뜻한 시선 하나가 또 다른 어른을 바꾸고,

그 어른이 또 다른 아이를 지킨다. 그렇게 사회는 바뀐다.
한 번에 무너지지 않듯, 한 번에 바로 서기도 하지 않지만, 한 사람의 행동은 결국 방향을 만든다.


5) 어른의 정의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을 미루지 않는 일이다.”
이 문장을 나는 내 딸들에게, 그리고 언젠가 어른이 될 모든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어른의 정의는 권위가 아니라, 감수성이다. 부모의 정의는 지배가 아니라, 존중이다.
사회 구성원의 정의는 방관이 아니라, 참여다. 우리 모두의 무심함이 한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면,

우리 모두의 관심이 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거대한 제도가 아니라, 작은 마음의 방향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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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은 울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가 되기를..


나는 종종 생각한다. 한 아이의 생명은 얼마나 많은 어른의 무관심 위에서 꺼져가는가.
아이들은 소리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신호를 보낼 뿐이다.

그 신호는 아주 미약하다. 눈을 피하는 시선, 밥을 남기는 손,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 그 모든 게 말 없는 구조 요청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미약한 신호를 잡아내지 못했다. 귀는 열려 있었지만, 마음은 닫혀 있었다.
손은 있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죽었다. 그리고 또 죽었다. 세상은 변해야 한다.

그 변화는 거창한 혁신이 아니라,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누군가의 슬픔을 ‘뉴스’가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이는 감수성. 그 감수성이 우리 모두의 일상 안에 뿌리내릴 때,
비로소 아이들의 울음은 멈출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며 늘 ‘한 사람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품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 한 사람이라면, 그건 충분히 큰 기적이다.

혹시 오늘, 당신의 이웃집에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잠시 당신의 마음에 남는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다. 우리의 침묵이 한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한마디가 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그 한마디가 바로 ‘신고’ 일 수도 있다.


아동학대 신고 안내

� 112 : 아동학대나 가정폭력을 발견했을 때 즉시 신고 (24시간)
☎️ 129 : 보건복지상담센터 (아동복지, 보호, 지원 상담 가능)
☎️ 1391 : 아동학대 신고상담센터 (전문상담 및 긴급조치 연계 가능)


� 기억하세요.

신고는 ‘간섭’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우리가 그 아이의 이름을 다시 뉴스에서 보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신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written by Yoodaram
“그 아이가 남긴 신호를, 이제는 우리가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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