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기념일, 잊지 않아도 좋은 이유

: 일상의 관성을 멈추고, 다시 '우리'를 바라보게 만드는 브레이크

by 유다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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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끼리 무슨 기념일이야"라는 가장 슬픈 직무유기


결혼 연차가 쌓이고 아이가 태어나면, 부부의 달력에서 붉은색 동그라미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다.


연애 시절에는 100일, 200일, 처음 손잡은 날까지 기를 쓰고 챙기더니, 이제는 결혼기념일이나 서로의 생일마저 "바쁜데 그냥 넘어가자", "가족끼리 쑥스럽게 무슨 이벤트야"라며 멋쩍게 생략해 버린다.

마치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철없는 신혼부부들의 전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가족이니까, 이미 잡은 물고기니까 더 이상 미끼를 주지 않아도 되는 걸까?


요즘 SNS를 켜면 기념일은 온통 '자랑 대회'다. 어느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했는지, 어떤 명품 브랜드의 오렌지색 박스를 받았는지가 사랑의 척도처럼 전시된다. 이런 피로감 때문에 오히려 기념일을 챙기는 것을 속물적이라고 치부하며 회피하는 부부들도 많다.


그러나 비싼 선물과 화려한 이벤트가 없다고 해서, 그날의 '의미'마저 생략해서는 안 된다.


기념일은 단순히 선물을 교환하는 날이 아니다. 거침없이 굴러가는 퍽퍽한 일상의 수레바퀴에 잠시 제동을 걸고, 우리가 왜 이 험난한 인생을 함께 걷기로 했는지 그 '초심'을 복기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귀찮음과 익숙함이라는 핑계로 기념일을 패스하려는 당신에게, 우리가 왜 기를 쓰고 이 날을 잊지 않고 챙겨야만 하는지 그 묵직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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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념일은 부부의 '감정 저축 통장'이다


인생은 길고, 결혼 생활은 지루하며, 부부 싸움은 필연적이다.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게 되는 날, 이혼 서류를 만지작거릴 만큼 절망적인 순간이 어느 부부에게나 찾아온다. 그 벼랑 끝의 위기에서 두 사람을 다시 붙잡아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머리로 하는 이성적인 계산이 아니라, 가슴속에 쌓아둔 '따뜻한 기억의 잔고'다.


기념일을 챙긴다는 것은 바로 이 '감정 저축 통장'에 잔고를 쌓는 행위다.


"작년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나 몰래 써준 편지가 참 따뜻했지."


"내 생일날 아내가 차려준 미역국이 진짜 맛있었는데."


비록 지금 당장은 미워 죽겠어도, 나를 귀하게 여겨주었던 그날의 기억들이 하나의 '방어막'이 되어 감정이 완전히 파탄 나는 것을 막아준다.


기념일을 챙기지 않고 건조하게 지나가는 부부의 통장은 잔고가 '0원'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꺼내 쓸 좋은 기억의 완충재가 없으니, 작은 다툼에도 쉽게 관계가 부서져 버린다. 기념일은 평화를 위한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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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상의 관성을 끊어내는 '브레이크(Brake)'


수빈이와 다빈이를 키우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우리의 일상은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과 같다. 속도를 늦출 수도, 마음대로 내려올 수도 없다. 우리는 점차 '남녀'가 아니라 전우, 하우스메이트, 공동 양육자로 변해간다.


이 무서운 일상의 관성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부부 사이에는 '적막'과 '무심함'만이 남는다. 이때 기념일은 러닝머신을 강제로 멈추게 하는 비상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 애들 일찍 재우고 와인 한잔할까?"


이 한마디는 마법처럼 우리를 다시 2011년 6월의 풋풋했던 신랑 신부로 되돌려 놓는다.

늘어난 티셔츠 대신 조금 예쁜 옷을 꺼내 입게 만들고, 아이들의 성적표나 대출 이자 이야기 대신 '당신과 나'라는 온전한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강제로라도 일상을 멈추고 서로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는 이 하루가 없다면, 우리는 평생 서로의 굽은 등짝만 보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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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살 연하 남편의 장미 한 송이가 가르쳐준 것


우리 부부도 늘 여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6살이나 어린 남편과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시작했던 신혼 시절, 우리에게 값비싼 레스토랑이나 명품 선물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결혼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내 생일날이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남편은 오지 않았고, 나는 좁은 집에서 홀로 덩그러니 저녁을 차리며 서운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돈이 없어서 선물을 못 사 오니까 미안해서 늦게 오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땀범벅이 된 채 문을 열고 들어온 남편의 손에는, 다 구겨진 검은 비닐봉지와 장미꽃 딱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알고 보니 쥐꼬리만 한 용돈을 아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조각 케이크를 사고, 나에게 줄 장미꽃 한 송이를 사기 위해 몇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발품 팔아 뛰어다닌 것이었다.


그날 노란 장판 위에서 비닐봉지에 담긴 조각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땀 냄새가 나는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그때 깨달았다. 기념일의 본질은 '얼마짜리'를 주느냐가 아니라, 나를 위해 당신이 '어떤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했는가에 있다는 것을. 그날의 장미 한 송이는, 훗날 내 손에 쥐어질 그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도 내 영혼을 깊숙이 덥혀준 최고의 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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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가 아니면 안 되는 날"을 선물하라


"미안해, 바빠서 깜빡했어. 주말에 맛있는 거 먹자."


기념일을 잊고 지나간 배우자가 가장 흔하게 하는 변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지하고 잔인한 폭력이다.


기념일은 365일 중 364일을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배우자에게 "오늘 하루만큼은 네가 주인공이야"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는 날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나만이 내 배우자에게 해줄 수 있는 절대적인 인정과 사랑의 의식이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퇴근길에 무심코 내민 좋아하는 브랜드의 마카롱 한 상자, 삐뚤빼뚤한 글씨로 "나랑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적힌 포스트잇 한 장이면 충분하다.


핵심은 '나는 잊지 않았다'는 시그널을 주는 것이다. 당신이 나의 아내(남편)가 된 그 찬란했던 날을, 당신이 태어나 내 곁으로 와준 그 기적 같은 날을, 내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다는 그 마음의 전달. 그것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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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이 팍팍한 삶을 견딘다


누군가는 묻는다. "다 아는 사이에 뭐 하러 유난스럽게 챙겨요. 마음으로 다 알지."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해주지 않고, 눈에 보이게 챙겨주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결코 100%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이토록 지치고 팍팍한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다.


기념일은 그 고단한 인생의 여정 중간중간에 세워진 '오아시스'와 같다. 그곳에 들러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서로의 먼지를 털어내주어야만 우리는 다시 내일을 향해 걸어갈 힘을 얻는다.


다가오는 우리의 기념일에는 쑥스러움을 핑계로 숨지 말자.


화려한 오마카세가 아니어도 좋다.

집 앞 삼겹살집에서 소주잔을 부딪히더라도, 서로의 눈을 깊게 맞추며 말해주자.


"내 인생에 와주어서, 수빈이 다빈이의 멋진 부모가 되어주어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기억하라. 사랑은 표현하는 자의 것이고, 행복은 잊지 않고 챙기는 자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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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한 일상에 '특별함'이라는 마법을 뿌리세요


"여보,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이 질문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남편분들, 속으로 뜨끔하셨나요? 반대로 기념일마다 무심한 남편 때문에 혼자 속앓이 하며 눈물짓는 아내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우리는 너무 쉽게 '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서로에 대한 예의를 생략합니다.

하지만 가족일수록, 내 곁에 숨 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람일수록 더 격렬하게 챙기고 표현해야 합니다.

이번 주말, 달력을 한 번 넘겨보세요.

잊고 지나간 기념일이 있다면 늦게라도 조각 케이크 하나를 사 들고 들어가 "그날 못 챙겨줘서 미안해"라고 쑥스럽게 건네보세요.

그 작은 케이크 하나가, 아내의 맘속에 쌓인 서운함의 빙하를 단숨에 녹여버릴 마법의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결혼은 잊혀지기엔 너무나 아깝고, 찬란한 기적이니까요.


평생 당신과의 기념일을 기억하고 싶은, 유다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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