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O를 처음보다.
그날은 유난히 맑은 날씨의 조용한 오후였다.
점심을 먹고 막 커피를 마시려던 순간,
회사 대표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재무팀 맞으시죠? 00 주거래은행입니다.”
목소리는 지나치게 다급하게 느껴졌다.
그 말투 하나만으로도 느낌이 왔다.
좋은 전화는 아니라는 걸.
“어음 결제, 미결입니다.
1차 부도 통보 들어갑니다.”
순간, 귀가 멍해졌다.
회계업무도, 자금업무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던 사회초년생 시절이었다.
‘부도’라는 단어는 뉴스에서나 보던 남의
일이었고, 그게 지금, 우리 회사이야기라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잠시 뒤, 원인이 밝혀졌다.
내 사수였던 자금담당 김 과장의
‘단순 실수’였다.
팀장이 소리지르며 난리를 피우며
다그쳤지만, 김 과장은 그냥
'단순 실수'라고만 반복했다.
코스피 상장사 계열사.
모니터의 작은 숫자 하나, 일정 하루 착각
하나가 본사와 관계사, 두 개의 상장사
전체를 흔들 뻔한 순간이었다.
일반적으로 부도통보는 은행 업무종료 후에
오는데 모회사의 규모를 아는 은행직원이
낮 2시에 사전에 연락을 해주었다는 것을,
하급직원인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후 2시 05분
본사 CFO 겸 부사장님 얼굴도, 그 높으신
분이 직접 우리 회사 사무실로 뛰어 내려온
것도 처음 봤다.
“지금 상황 정리해서 바로 올라오세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굴까지 붉어진,
입사 후 처음 보는 본사 CFO님의 모습과
사무실 전체를 가르는 긴급한 외침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무서웠다.
그렇게 급하게 열린 회의실에는 임원들이
다급하게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여직원과 함께 막내인 나까지 모두 불려간
회의실 공기는 숨이 막힐 만큼 무거웠다.
처음 뵙는 본사 CFO님의 아우라와
포스에도 기가 눌렸다.
은행은 1차 부도 통보를 넣은 상태.
어음대금은 은행마감 시간인 오후 4시.
막지 못하면 부도공시는 불가피.
공시가 뜨는 순간, 주가는 폭락.
그리고 그 책임은 재무라인이 진다.
오후 4시까지 남은 시간, 단 두 시간.
그 두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모니터 속 엑셀숫자는 단순 숫자놀음이 아니라
실물 돈이자, 기업을 한 순간에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시간과 신뢰의 문제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오후 3시
본사 CFO님은 긴급회의를 주관하시는 중에도
은행측과 직접 전화를 돌려 소통하셨다.
일반적으로 김과장과 은행실무직원간,
자금담당임원과 은행 부지점장급정도가
일상업무를 위해 소통한다.
CFO님이 직접 은행과 연락하는 경우는
대규모 대출이나 회장님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거의 본 적이 없다.
자금팀은 가능한 모든 통장을 긁어모았다.
이쪽에서 5억.
저쪽에서 3억.
막아야 할 어음은 10억.
2억이 모자랐다.
주간단위의 자금계획이나 운영되는
자금규모에 비해서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짧은 시간에 계획에 없던 돈을 급하게
만드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찌할지 몰라 허둥대는 자금팀과
관계사간 전화가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본사 CFO님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개인 신용이라도 내서 막는다.”
그 말 한마디에 회의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상장사 CFO가 개인 신용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시한번 모두가 직감했다.
다행히도, 마지막 순간
계열사 한 곳에서 자금이 도착했다.
오후 3시 58분
어음 결제 완료.
딱 2분을 남기고,
회사는 ‘형식적인 부도’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겨우 피했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모두가 동시에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날, 우리 회사는 살았다.
그리고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 하나가 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두 시간도 안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배운 점은,
CFO는 숫자만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사가 무너지지 않게
“마지막으로 서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동시에 더 아픈 현실 하나를 마주했다.
내 사수는 그 사건 이후 사실상 ‘끝’이었다.
실력도, 책임도, 누구 하나 그를 믿지 않았다.
더 이상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내가 입사 때부터 사수는 업무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본인이 하던 일을 넘겨주는 것인데도
대충대충 알려주고 피식피식 웃으면서
"나도 그렇게 배웠어
회사는 다 그런 거야
네가 알아서 해야 돼."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치며 일하다가 주변
눈치를 살피고는, 그 딩시 거의 하지 않던
지뢰찾기라는 PC게임으로 시간을 죽치던,
찌질함 가득했던 사수의 모습은 사회 초년생인
나의 눈에도 '태도'가 너무 문제로 보였다.
한참 입사선임이었던 사수의 구태의연함과
작은 실수들의 반복, 그 실수후에도
되려 다른 사람을 탓하는 태도들이
나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일을 모를 수는 있다.
누구나 처음부터 아는 것은 아니니.
그렇지만, 모르면 배우려고 하고
이쪽에도 물어보고 저쪽에서 찾아보고
노력하면 될 것을 여유시간은 허비하고는
급한 일이 터지면 그때서야 허둥대는
그런 사수의 태도에서 배울 게 없었다.
그런 평소의 태도와 업무스타일이 회사전체를
위기에 빠뜨렸지만, 그에게서는 별다른
태도의 변화를 볼 수 없었다.
그후 나는 혼자 업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홍대 근처 회계사 학원의 야간 원가수업,
조세통람사 법인세교육과 회계교육, 회사에서
지원을 안 해주면 그냥 내 돈 내고 다녔다.
주중에는 밤 10까지 야근이 많아 주로 주말을
활용하였고, 주경야독으로 자금, 회계, 세무,
원가와 업무에 대한 지식을 파고들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김 과장 같은 사수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냥 알고 싶었고 제대로 하고 싶었다.
이왕에 하는 일인데 자세히 원인과 과정을
알고, 결과가 나오는 이론과 실무의 연계점을
짚어서 A부터 Z까지 알고 싶었다.
다시는 ‘모른다’는 이유나 단순 실수로 회사를
위기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나만의 사명처럼 업무공부를
해나가며 이론과 실무를 익혀나갔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1차 부도 통보는
내 인생 첫 번째 ‘신호등’이었다.
그날의 경험이 컸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십여 년이 지나서도 배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직원들에게도 가급적
많은 내부, 외부교육의 기회를 주려한다.
물론, 직원들이 원할 경우에.
나의 신입시절 모습처럼 배우려고
애를 쓰는 직원들을 간혹 만날 때면
속으로 너무 반갑고, 다방면으로
물심양면 도와주려 마음을 쓰게 된다.
그리고, 직원들의 모습을 작은 것부터
여러 각도로 관찰하며 '태도'를 자주 본다.
겉으로는 열심히 하는 '척'을 하면서
실제로는 아닌 '김과장같은' 친구들을
경계하고 회사의 위기를 사전에 방지하려
노력하게 된 것도 그날의 일들 때문이리라.
그날의 위기상황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평범한 재무팀 직원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CFO라는 자리에 대해,
책임이라는 무게에 대해
엑셀상의 숫자와 자료의 중요성에 대해,
윗 분들 보고자료의 신중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CFO는 책상물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기에 가장 먼저 떨쳐 나서고 사재라도 털어
회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사회생활 첫 사건으로 배웠다.
CFO 실전노트 – 2화의 한 줄 정리
회사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위기"가 아니라,
그 위기를 '아무 일 아닌 척' 넘기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