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상록

인생을 바꾼 글쓰기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불씨

by 유병천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상을 받은 건 과학 독후감 쓰기였다. 최우수상도 아니고 우수상도 아닌 입선이었다. 그 상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국어 시간 때 학용품을 주제로 글 짓는 시간에 쓴 시는 교실 벽에 한 달이 넘도록 걸려있었다. 당시 담임선생은 나에게 많은 칭찬의 말을 선물로 주셨다. 어린 시절에 받은 칭찬이 살아가면서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민에 빠지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난 자연스럽게 펜을 들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도 글을 제법 많이 썼다. 당시의 노트를 보면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다. 이십 대 초반 군에 입대한 후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약 10년간 글을 쓰지 않았다.


망원동에 이사 올 무렵 내 나이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오래된 상자 속에서 발견한 고교시절에 쓴 몇 권의 일기장은 나를 다시 글쓰기의 세계로 인도했다. 어릴 적 무협지의 세계에 빠져 시력이 나빠진 이후 학교 공부에 필요한 책 이외엔 잘 읽지 않았다. 지식의 크기가 작으니 쓸 이야기도 부족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1학기 여름 방학부터 매주 일요일에는 국회도서관을 찾았다. 전공분야이자 관심이 많았던 경영학 관련 책을 탐독했다. 매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온전하게 독서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 점심은 국회도서관 지하의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열람실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경영 관련 책이 지겨워질 때 동화로 읽었던 생텍쥐페리의<어린 왕자> 완역본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독서하며 인상적인 문장을 만나면 펜으로 메모를 했다. 이면지에 했던 메모는 아직도 책꽂이에 남아있다. 이 메모들이 내 첫 책의 씨앗이 되었다. 한 권의 책을 쓰려면 500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5년 반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살았다. 그렇게 읽은 책이 500권이 넘을 즈음 난 책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한 번도 책을 써본 적이 없던 나는 책을 쓰기 위한 책을 읽었다. 다행히도 책을 쓰는 방법에 관한 책도 정말 많았다.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거나, 당신도 책을 낼 수 있다는 제목의 책들부터 읽었다. 글쓰기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책은 이만교 선생의 <글쓰기 공작소>였다. 책을 정독한 후 불필요한 문장들을 가지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시작한 글쓰기도 일 년을 넘게 하고 나니 원고가 제법 쌓이게 되었다. 글을 읽어줄 독자도 한 명 없었고, 혼자서 읽고 수정하고 다시 읽고 또 수정했다.


글쓰기는 이미지(인상)를 정리하는 것이다.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문법은 뒤로하고 횡설수설하고 있진 않나 걱정도 많이 했다. 글쓰기 관련 책을 읽은 후 교정을 하니 원고가 생각보다 많이 줄었다. A4용지에 빼곡히 쓴 원고가 100매 정도 되었을 때 난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 갔던 출판사에서는 무명작가에 주제에 관한 전문가도 아니라 한 방에 퇴짜를 맞았다. 먼 친척이 운영하던 출판사였는데 원고조차 읽지 않고 철없는 아이를 타이르듯 훈계만 했다. 독서에 5년 반. 쓰는 데만 1년이 걸렸는데,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소개를 받아 겨우 첫 책을 출간했다. 신기하게도 책이 나오기 1개월 전에는 약간의 디프레션(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토록 바라던 책의 출간을 앞두고 나의 심리 상태는 너덜너덜한 천조각 같았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마음을 쓰고 있을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책 나온다고 내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까. 정말 많은 생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평소 해오던 경영에 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던 시기이자 인문학에 관심이 높아진 시기도 바로 그때였다.


출간된 첫 책을 받았을 때의 감정은 복잡했다. 기쁘기도 했고 허탈하기도 했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시간도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때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자신감이었다. 나도 해낼 수 있구나.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니 되는구나. 좋은 글 따라 쓰고 내 생각과 경험을 더해서 쓴 글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다. 감명받은 후 메모했던 명 문장들, 메모를 보며 정리한 내 생각들, 그걸 바탕으로 쓴 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태어났다. 사실 책이 나왔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그렇게 생긴 글쓰기 습관으로 인해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앞두고 있을 땐 항상 글로 생각을 정리한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는 분명 말보다는 글이 더 나았다. 글쓰기는 내게 심사숙고라는 보너스까지 준 셈이다.


이젠 실용서가 아닌 문학이란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동화를 쓰고 소설을 쓴다. 힘겨운 일상을 견디며 창작에 마음을 쏟는 일은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일이 많다는 이유로 창작을 소홀히 하고 있지만, 마음속의 불씨는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다. 마음속의 불씨가 타오른다는 것은 글쓰기가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유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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