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간의 갈등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용서해도 며느리는 용서 못한다.
시댁의 시자만 들어가도 싫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는 고부간의 갈등이다. 그만큼 이들 관계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반론일 수도 있다. 과연 자신이 선택한 반려자에게 또 그들의 가족에게 그런 무자비한 표현을 서슴지 않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자들은 처가댁에 비교적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기대치와 보상심리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고 싶다. 기대가 없는 상황이나 무관심한 상황에서는 실망이나 미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姑婦(고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는 이해는 존재하지 않고, 욕구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며느리는 시어머니께 무엇을 원하는지? 깊이 있게 고민하긴 할까? 이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말이라도 달갑게 들리지 않는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 이유를 남자는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상황을 보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머니를 통해 또는 아내를 통해서 듣기 때문이다. 이때 다분히 자신의 해석이 반영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내용이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대단한 일들이 아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일은 아들을 둔 엄마라면 본인도 스스로 시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젊은 날 엄마들은 자신이 시어머니가 되면 절대 그렇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한다. 아무리 이렇게 다짐하더라도 고부간의 소통은 쉽지 않다.
조선시대를 생각해보면 며느리란 존재는 다른 성씨를 가진 집안의 유일한 이방인이다. 아니지, 시어머니도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이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고 시어머니가 죽으면 ‘안방마님’이 된다. 다시 말하면 곳간의 열쇠를 쥐게 되는 것이다. 산업이 발전하기 전의 시대에 곳간을 담당하는 사람은 집안에서 커다란 권력을 가진다. 그런데 그 권력을 얻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온갖 시집살이를 견뎌야 하고 결국에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 이때부터는 며느리도 어느 정도의 힘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차기 곳간의 주인, 다시 말하면 곳간의 열쇠가 넘어오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자신이 힘들게 낳고, 소중하게 키운 아들과 곳간의 권력을 며느리에게 빼앗긴다는 잠재의식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핵가족화가 된 현대에도 통할까? 재산이 엄청나게 많고 시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에는 조선시대 같은 상황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까?(재산이 많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말실수’라고도 하지만 보통의 관계에서는 실수로 들릴 수 있는 이야기도 고부간에는 의도를 가진 ‘가시 박힌 말’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식 잘 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식들은 그 점을 인식하고 부모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시부모는 며느리를 잘 대해주는 것이 곧 아들을 잘 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고부가 자주 만나지 않는다면, 혹은 잘해주는 것이 도저히 안 된다면, 그럴 땐 친절한 시늉 혹은 연기를 해보자(이왕 한다면 가식적으로 하는 것보단 마음을 담아서). 한두 번 하다 보면 관계가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유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