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상록

어리광

어른이 된다는 것

by 유병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릴 적엔 막연한 상상을 하곤 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 어른이 된다. 군대에 다녀오면 어른이 된다. 장가 가면 어른이 된다. 아이를 낳으면 어른이 된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도대체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마흔다섯의 세월을 지나며 느끼는 '어른'은 나이가 들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빠가 되는 것과는 달랐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말 수가 줄어드는 것만이 아니다.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고, 비빌 언덕이 사라지고, 기댈 곳이 없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리광을 피울 대상이 없어진다는 것. 그 기분을 뭐라 형용할 방법이 없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손디아 (어른, 나의 아저씨 OST)


의사결정을 할 때 지독하게 외롭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의사결정의 결과에 따라서 짊어져야 할 무게가 무척이나 무겁기 때문이란 이야기다. 어른이 되면 원하지 않아도 짐을 짊어진다. 좋은 어른이란 어떤 것일까.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해서 짊어지는 사람일까. 무거운 짐을 지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은 스스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때론 어리광을 피우려고 해도 그 어리광을 받아줄 사람이 없다. 어른이 피우는 어리광은 어리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어리광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없다는 표현이 더욱 적확(的確)할지도 모르겠다. 때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를 찾아서 헤매기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다. 어린 나이에도 지독하게 무거운 짐을 지고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어른이다.


아버지가 맨날 하던 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한테 그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
-박동훈 (나의 아저씨)


'삶의 무게'와 더불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의 이름은 '허무'와 '무력감'이다. 인간의 의사결정이 이성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선택의 순간 감정에 휘말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그렇다. 어른이라고 해도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는 없다. 그토록 지키려고 하던 마음이라도 울컥하며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계한다고 해서 무력감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순 없다. 그것은 대부분 '타인의 말'에 의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소심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소심해서가 아닌지 모른다.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해가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중에 '상대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마음에 꽂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문을 외울 수밖에......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 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신해철 (아버지와 나 Part 1)


어떤 철학자는 삶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한다. 난 어떤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는 스티븐 코비의 책 제목은 뒤로하고 우선순위보다 일정에 파묻혀 살아가는 요즘, 눈을 감고 있으면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난 내 인생의 몇 퍼센트쯤 와있는 것일까?'


-유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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