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상록

마음 기댈곳

술을 마시는 이유에 관하여

by 유병천

안주와 술 먹는 순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술을 처음 마신 시기엔 소주의 알코올이 25%였다. 투명한 소주잔에 한 잔을 채워 입에 털어 넣으면 저절로 인상이 구겨지고 나도 모르게 '크으'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렇게 맛없는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술을 마신 후 쓴 맛을 없애기 위해 서둘러서 안주를 먹었다. 소주란 그저 정신을 놓기 위해 마시는 도구처럼 느껴졌다.


술은 알코올을 포함하고 있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알코올을 마시는 것과 같다. 이상심리 수업시간에 교수가 질문했다. '알코올은 사람을 업(Up)시킬까요? 다운(Down)시킬까요?' 많은 사람이 업시킨다고 대답했다. 술을 마시면 뭔가 들뜬 기분이 되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나도 업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답은 반대였다. 알코올은 아편처럼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물질이라고 했다. 알코올이 체내에 흡수되면 많은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술을 계속 마시면 무기력한 상황이 되고 흐느적거리며 잠들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알코올이 기능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우리 뇌에는 평소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알코올이 가장 먼저 마비시키는 부분이 거기입니다. 그래서 평소와 다른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런데 계속 알코올이 체내에 흡수되면 무기력해집니다. 술만 마시면 소위 개가 된다거나 하는 사람도 있죠? 술을 마셔서 개가 되는 게 아니라 전두엽이 기능을 못하면서 잠재되어 있는 개가 나오는 겁니다.'


어릴 적에는 주변 어른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에 관해 궁금했었다. 얼굴 표정이 찡그려질 정도로 쓴 술을 왜 마시는 걸까? 그들도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무언가를 꺼내고 싶었을까. 힘든 일을 잠시나마 잊고 싶어서 마신다는 사람도 만났고,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 마신다는 사람도 만났다. 30대가 되기 전까지는 나도 쓰디쓴 소주를 마셨다. 속에서 불이나고 위장이 약해질 무렵 알코올 함량이 낮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25% 소주를 마실 땐 너무 써서 쓴 맛을 바로 감추기 위해서 안주를 먹었다. 안주가 없을 땐 물이라도 마셔야 했다. 하지만 저알코올의 술을 마시면서 꼭 술을 마신 후에 안주를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즐겨마시는 와인이나 막걸리 중에는 술 자체로도 훌륭한 맛을 지니고 있는 것도 많았다. 더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아도 되었고 맛을 음미할 수도 있었다. 와인책을 찾아보며 '마리아주'라는 우리말로는 궁합이란 것을 생각하며 술과 어울리는 안주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어떤 술은 안주를 먹은 후 마시면 더욱 맛이 좋은데,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지방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가면 그 지방에서 나오는 막걸리를 마셔본다. 재료와 빚는 방법이 달라서 그런지 맛도 제각각이다. 매년 겨울 주문진에 복어회를 먹으러 간다. 겨울철에 먹는 밀복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주문진에 갔을 때도 그 지역에서 나오는 막걸리를 샀다. 호기심에 조금 맛을 봤을 땐 상상했던 막걸리보다 엄청 신맛이 강했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다른 막걸리를 몇 종류 더 샀다. 저녁 시간이 되어 떠온 복어회와 막걸리를 꺼냈다. 그래도 뚜껑을 열었던 막걸리를 먼저 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신맛이 강한 막걸리를 마셨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복어회와 함께 먹은 신맛이 강했던 막걸리가 엄청 맛있게 느껴졌다. 여럿이 나누어 마시니 한 잔 정도밖에 마시지 못했다. 함께 사온 다른 종류의 막걸리는 평소에 마시던 막걸리와 비슷한 맛이었지만, 복어회와 함께 먹기엔 정말 궁합이 맞지 않았다.

술과 안주에도 궁합이 있는데, 사람과 사람은 어떨까. 술을 마시는 이유를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는 전두엽의 지시를 잠시 놓고 싶을 때도 있고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을 잊어버리고 싶을 때도 술이 생각난다. 저마다 술을 마시는 이유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좋은 술과 좋은 안주 그리고 좋은 친구와 함께 마시길 누구나 바라지 않을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어떤 외국인 여자가 올린 이미지를 봤다. '사람들은 못됐어. 치킨 먹는 재미로 사는 거지. 섹스는 성병만 남기고, 우정은 가식이고, 연애는 배신과 상처만 남기고, 가족은 결국 의절하는 사이가 되지만, 피자의 맛은 영원하다.' 이런 거친 언어가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자극할 때 치즈 한 조각과 와인 한 잔에 행복을 이야기했던 에피쿠로스의 마음이 생각나기도 한다.


마음에 교통사고가 나면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지치고 힘든 몸을 뉘일 곳도 필요하지만,
우리에겐 마음 기댈 곳이 필요하다.


-유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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