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많은 책을 읽었고, 예전에는 그 존재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무언가가 자신에게서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바로 영혼이었다.
영혼은 무엇일까? 부정의 방식으로는 규정하기가 쉽다. 즉 대수학적수열이라는 말을 들으면 슬그머니 숨고 싶은 것이 영혼이다.
그렇다면 긍정의 방식은 어떨까? 영혼은 자신을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를 용케 피해 가는 듯하다. 예전에는 디오티마의 내면에 무언가 근원적인 것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솔질을 많이 해서 너덜너덜해진 예의바람의 옷으로 말려들어간, 예감으로 가득 찬 감수성이었는데, 그녀는 이것을 지금 영혼이라 부르며, 납염 처리된 마테를링크의 형이상학 속에서, 노발리스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기계 시대가 한동안 자기 자신에게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저항을 표현했던 빈혈증적 낭만주의와 신에 대한 동경의 거대한 파동 속에서 재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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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치 국장과 결혼 후 디오티마는 영혼이 사라졌다고 한다. 예감으로 가득 찬 감수성이 사라졌다는 말인데, 기계 시대가 감수성을 앗아갔다는 말로 여겨진다. MZ세대가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100년의 세월 동안 잃어버린 감수성을 찾고 싶은 저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논리와 합리 속에 빈혈을 느끼는 영혼들은 이 시대에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디오티마의 내면에 존재하는 고요함과 부드러움, 경건함, 선함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것들은 이제껏 한 번도 제 길을 찾지 못했고, 우리의 형태를 결정짓는 운명의 주조 공장에서 우스꽝스러운 이상주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판타지일 수 있고, 혹은 날마다 육체라는 덮개 밑에서 진행되는 본능적이고 자율적인 성장 과정에 대한 예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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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티마의 영혼이 추구하던 고요함과 부드러움, 경건함, 선함은 돈과 숫자와 증거와 증명과 발명 그리고 발견에 자리를 내어준 듯싶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융합이란 언어까지 영혼을 밀어내는 데에 한 몫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100년 전에 예견된 사실을 시대가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페달을 굴려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를 탄 운명처럼 좀처럼 멈출 수가 없다. 오로지 더 빨리 페달을 밟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영혼이라 불렀던 것은 아마 결혼 당시 갖고 있던 '사랑의 능력'이라는 변변찮은 자본에 다름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투치 국장은 그 자본에 제대로 투자할 마음이 없었다. 디오티마에 대한 그의 우월성은 처음부터, 또 제법 긴 시간 동안 좀 더 나이 많은 남자가 갖고 있는 우월성이었다. 투치 국장은 자상했던 신혼 시절만 제외하면 항상 효용성과 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합리적인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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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성공한 투치 국장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인 효용성과 이성으로 무장한 합리적인 인간이다. 아내 디오티마의 영혼이나 감수성은 효용성과 이성의 반대편에 서있다. 서로 다른 가치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형식적으로 유지되는 광경은 요즘 시대에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배우자가 기대하는 것이 서로 다른 상황에 이해를 바라지만, 공감과 인정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부부가 얼마나 많을까?
투치 국장은 직선으로 뻗은 길을 선호했다. 그는 야망이 큰 일꾼의 습관대로 살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말을 타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좋아하는 산책을 한 시간 정도 했다. 이런 활동은 몸의 유연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꾸준히 실행함으로써 책임감이 요구되는 업무에 꼭 맞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지나치게 꼼꼼하고 단순한 습관이었다. 투치는 다른 곳에 초대를 받지 않거나 집에 손님이 없을 때는 퇴근하자마자 곧장 서재로 향했는데, 그것은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 동료와 상사들보다 우위를 지키려면 사무지식을 늘 최고의 수준으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 확고한 한계를 설정해 두고, 사랑조차 기타 활동으로 분류하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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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치 국장의 모습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다.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가장 많은 요구를 받은 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치 투치 국장처럼 살지 않으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요받는 것처럼 말이다. 투치 국장처럼 살며 낭만을 꿈꾸는 것이나 영혼을 돌보는 일이 가능할까? 합리적인 낭만, 효율적인 영혼이란 수식어를 만나지 못한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 뿐이다.
디오티마는 때론 이 모든 것이 세계를 목적 없는 사악한 게임으로 만들어버린 물질주의적 시대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신론, 사회주의, 실증주의가 판치는 시대에는 영혼이 충만한 어떤 인간도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 승화할 자유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책임 전가도 소용없을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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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티마의 시대 탓이 100년이 넘어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는 모습과 영혼과 낭만을 추구하는 모습 사이에 갈등하며 시대나 환경 탓을 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 존재할까? 좋은 위치를 선점한 소수의 세력은 무능과 비효율을 조롱하며 당신도 열심히 한다면 잘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본의 속성을 학습해 버린 상황에서 어떤 책임 전가도 소용없을 때가 많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