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상자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17)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by 유병천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55. 졸리만과 아른하임


졸리만은 밤낮 책상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주인이 유명한 손님들과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눌 때면 주인의 발아래나 등뒤 혹은 무릎에 앉아 있었다. 스콧과 셰익스피어, 뒤마의 책이 책상에 뒹굴면 그 책들을 읽었고, 정신과학 편람으로 글쓰기를 배웠다. 또한 주인의 사탕을 먹었고, 어려서부터 아무도 없으면 주인의 담배를 피웠다. 잦은 여행 때문에 불규칙하기는 했지만 가정교사가 와서 그에게 기초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졸리만은 이 모든 게 끔찍하게 지루했다.
-343


주인과 하인과의 관계에서 주인이 베푸는 배려에 하인의 모습에서 신분의 차이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서커스단에서 데려온 아이라는 사실이 먼저 떠오른다.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볼 수 있는 대목이다.


56. 평행운동 위원회들의 활발한 활동. 클라리세가 백작에게 편지를 써 ‘니체의 해’를 제안하다


울리히의 당혹감을 눈치챈 백작은 진지하고 인자하게 말했다. “흥미롭지 않은 제안은 아닐세. 열정과 의지가 넘치는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개별적인 제안은 미뤄둘 수밖에 없어. 그러지 않고는 우리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지. 이 편지를 보낸 여성을 자네가 개인적으로 아는 것 같으니, 이걸 자네 사촌 부인한테 직접 전해주면 어떻겠나?”
-351


클라리세의 제안에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대응은 무척 현명해 보인다. 울리히의 지인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불편함을 최소화시키려는 모습이다. 거절에도 기술이 필요한 시대를 예감할 수 있다.


57. 비약적인 발전. 티오티마는 위대한 이념들의 본질에 대해 진기한 경험을 하다


지난 것은 모두 먼지로 바뀌었고 나중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352~353


까르페 디엠.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살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도 지금 순간을 소중하게 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물론 계획이나 목표 등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린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남의 인생이 아닌 나의 인생을 말이다.


라인스도르프 백작조차 디오티마를 만나 의논하면서 그녀의 정신적 에너지에 깜짝 놀랐다. 백작은 백성들 속에서 솟구치는 자발적 운동을 원했다. 물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백성들 의중을 살펴본 뒤 조심스럽게 위에서부터 영향을 끼쳐 정화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백성들의 이런 뜻을 단순히 지배자에게 바치는 의례적인 봉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는 여러 민족의 진실한 자성에서 비롯된 움직임이라고 폐하께 아뢸 수 있을 거래 생각했기 때문이다.
-356


정치에서 바라는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치인의 욕심을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진행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책이 실패할 경우에도 국민의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58. 평행운동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자발적인 후퇴는 없다


“제가 평행운동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뒤로 누군가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대체 평행운동으로 이루려는 게 뭐냐, 오늘날에는 위대한 업적이니 위대한 인간이니 하는 것들은 없지 않으냐, 하는 식이죠.”
-359


'위대한'이란 형용사는 사실 설명하기 어렵다. 업적이나 인간을 평가할 때 흔히 '위대한'이란 형용사를 붙이곤 하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많다. 듣는 사람에 따라 상대가 위대하게 생각하는 점을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울리히가 받고 있는 질문은 평행 운동에 실체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위대한 지성, 위대한 국가, 위대한 운동이 도대체 뭘까?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박사, 인류의 역사에서 자발적인 후퇴는 없네!”
-362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저 말은 요즘엔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등을 겪는 우리는 자발적인 후퇴를 결정하고 실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백작이 문가의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등을 돌려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시도 앞에선 겁을 먹고 주저하게 되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흔들어 깨워 떨치고 나아가게 해야지!" 아무런 위로의 말없이 울리히를 돌려보낼 수 없다는 의무감에서 나온 말이었다.
-363


실체가 없는 일에 관하여 의문을 품은 울리히에게 라인스도르프 백작은 두루뭉술한 말을 한다. 위대한 시도라는 것이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데도 말이다.


59. 모스브루거가 깊은 생각에 빠지다


우리는 거의 항상 똑같은 사람이랑 싸운다. 우리가 그렇게 터무니없이 집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사해 보면 그자는 우리의 자물쇠에 딱 맞는 열쇠를 가진 남자일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랑에서는 어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날마다 똑같은 연인의 얼굴을 보면서도 눈을 감는 순간 연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하지 못하는가! 혹은 사랑과 미움이 없는 경우는 어떤가? 사물은 습관과 기분, 관점에 따라 얼마나 끊임없이 변하는가! 기쁨은 얼마나 쉽게 가라앉고, 깨지지 않는 슬픔의 씨는 얼마나 불쑥불쑥 싹을 틔우는가?! 또 인간은 평화롭게 내버려 둘 수 있는 타인을 얼마나 태연히 때리곤 하는가! 삶은 지금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표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밑에서는 여러 사물이 어지럽게 서로를 몰아대고 밀친다.
-374


요동치는 인간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잠을 잘 못 자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더더욱 흔들리는 것이 감정이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를 이론도 있다. 인간은 감정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어느 한쪽의 주장이 맞다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두 가지 다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존재 말이다.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60. 논리적 도덕적 세계로의 탐사


나투라 논 페키트 살투스 (natura non fecit salus), 즉 자연에는 도약이 없다.
-375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자발적인 후퇴는 없다고 했는데, 자연에는 도약이 없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자연을 망가뜨리는 존재로 전락한 사피엔스의 모습이 씁쓸하다. 자연에는 도약이 없지만, 인간에 의해 타발적인 후퇴를 겪고 있는 건 아닌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