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인간 활동은 어쩌면 그 활동에 필요한 말의 수로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말이 많을수록 말의 성격은 점점 나빠진다. 예컨대, 인류를 원시상태에서 공중을 나는 단계로 이끈 모든 완결된 지식은 그 증명까지 포함해서 결코 수십 권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 나머지 지식은 지구만 한 서가를 내준다고 해도 다 채울 수 없을지 모른다. 펜이 아니라 칼과 사슬로 이루어진 방대한 토론은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선행적으로 모범을 보여준 정확한 과학적 방식을 따르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사안을 지극히 비합리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380
평소 사용하는 단어의 수나 말하는 빈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말이 많은 것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최소한의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말은 상처를 낳는 경우가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존 윅'에서는 살인 청부업자의 삶을 다룬다. 그들은 언어는 간결하다. 영화 장면에서 보여주는 칼과 총 대신 보통 사람은 말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나 상상해 본다. 결국 자신의 생각에 동조를 구하는 자와 그것에 반대하는 자의 대립은 칼처럼 날카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울리히는 강력한 내면적 성취에 나머지 외적 성취를 맞추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어났고 일어나는 중인 어떤 일에서 목표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에 관해 평생을 늘 외롭게 고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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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같은 성격의 소유자는 하나의 가치에 매몰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흑백주의자처럼 하나의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은 그와 반대되는 것을 적으로 만들면 쉽다는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냉소적인 판단 아래 과연 다른 가치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 옳은가? 아마도 울리히의 고민은 평생 동안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자기들 영역의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데 흠뻑 빠진 활기찬 사람들 모두가 미, 정의, 사랑, 믿음의 문제들, 간단히 말해 인본주의적 모든 문제를, 자신들이 그로 인해 실리를 얻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한, 아내에게 맡겨버리길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그럴 역량이 충분치 않다 싶으면, 천 년 전의 어투로 삶의 성배나 검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류들에게 넘긴다.
-384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다는 이론이 생각나는 문장이다. 자신의 이익을 합리화라는 언어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걸 아닌 척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표현 같다.
처음에 울리히는 이들이 말을 타다가 찰과상을 입고 절룩거리며 말에서 내려서는 상처 부위를 영혼으로 문질러야 한다고 징징대는 사람들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가소롭게 들리던 그 소리가 줄곧 반복되면서 차츰 반항을 불러오는 것을 목격했다. 지식이 시대와 어긋나기 시작했고, 현재를 지배하는 불명료한 인간 유형이 서서히 자신의 뜻을 관철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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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은 낯섦의 형태로 다가온다. 낯선 이론이나 표현이 점점 일상화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따라 하면서 생활화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구식이라고 표현하는 현상도 생기는 것을 우린 자주 목격하며 살아왔다.
자의식이 처음 싹텄던 청소년기를 훗날 돌이켜보면 감동과 감격으로 뭉클해질 때가 많다. 당시 그가 사랑한 온갖 다양한 생각들은 지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가정적(假定的) 삶’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여전히,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경험한 적 없는 모험이 될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불가피한 무지와 용기를 뜻했다. 또한 거대한 관련성에 대한 갈망과 망설이듯 삶으로 발을 내딛는 한 젊은이가 느끼는 ‘철회 가능성’의 묘한 분위기를 의미하기도 했다. 울리히는 그중 어떤 것도 무를 생각이 없었다. 무언가로 선택되었다는 떨리는 감정은 세상을 처음 관찰할 때 느끼는 유일하게 확실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감정을 돌아보면 유보 없이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랑을 찾았지만 맞게 찾은 건지 알 수 없었고, 죽여야 할 이유를 확실히 모르면서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점차 발전해 나가려는 의지 때문에 ‘완성’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저 완성된 것처럼 굴었을 뿐이다. 이 세계의 질서는 겉보기와 달리 그렇게 확고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떤 사물도 어떤 자아도 어떤 형태도 어떤 원칙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만물은 보이진 않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변화 속에 있었고, 확실한 것보다 불확실한 것 속에 더 많은 미래가 담겨 있었으며, 현재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았다.
-386~387
난 울리히를 가능성 인간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가정적 삶이라는 말이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이나 결과를 두고 그대로 판단하기보다 '만약 이랬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라는 가정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수많은 가능성을 상상하며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정신 능력이 성숙하면서 울리히의 내면에는 이제 ‘가정’이라는 불확실한 말 대신 분명한 이유에서 ‘에세이’라는 독특한 개념과 연결시킨 표상이 생겨났다. 에세이가 하나의 대상을 어려 절로 나누어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는 것과 비슷하게 세계와 자신의 삶도 그런 식으로 관찰해야 가장 올바르게 보고, 다룰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에세이는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파악된 대상은 삽시간에 외연을 잃고 하나의 개념으로 용해되기 때문이다).
-387
여기서 말하는 에세이는 수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논문을 이야기한다. 하나의 가정을 토대로 그것을 다양한 각도로 증명하려는 노력 말이다. 가능성 인간에게 매력적인 분야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독하다’는 말이 예를 들어 사랑, 만행, 노력, 엄격함 중 어떤 단어와 연결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네 가지 특성을 갖게 되는 것처럼, 도덕적 사건의 의미도 다른 것들의 종속변수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388
로베르트 무질은 언어를 정말 다채롭게 다룬다. 지독하다는 말에 연결시키는 단어에 따라 네 가지 표현은 열여섯 가지로 퍼져나간다. 어찌 보면 무척 피곤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능성의 화신, 잠재적 존재, 자기 삶의 쓰이지 않은 시로서의 인간은 문서로 기록된 인간, 현실로서의 인간, 특성을 가진 인간과 상반되었다.
-388
울리히의 특성은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같다는 표현으로 읽힌다.
건강한 삶이라는 게 오직 두 극단 사이의 중간 상태만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가! 건강한 삶의 이상이 실제로는 그 이상의 극단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라면 얼마나 옹색한가?! 이런 인식을 토대로 우리는 도덕적 규범을 변함없고 경직된 정관으로 보지 않고, 매 순간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유연한 균형으로 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획득한 반복적 습관을 자신의 성격으로 간주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 반복에 대한 책임을 성격으로 돌리는 것을 점점 더 편협한 것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390
한 사람의 반복된 행위는 습관이 되고 습관이 모여 성격이 된다. 한쪽 방향에 치우친 사람을 우리는 사고가 경직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철학의 문제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르는 문장이다.
철학자는 군대 없이 세계를 하나의 체계 속에 가두는 방식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폭군이다. 전제정치의 시대에는 거창한 철학들이 나온 반면, 진일보한 문명과 민주주의 사회에는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이 나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어쨌든 실망감에 찬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가 그랬다.
-391
정말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은 때론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많은 사람의 판단의 기준을 만들기도 했다. 철학이 사라진 시대라는 것을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도 우리는 시대의 철학에 종속되어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수학적 논문과 수학논리학적 논문을 쓰거나 자연과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목표를 구상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생각할 가치가 있는 물음은 올바르게 사는 방법에 관한 문제 하나뿐이라고.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요구를 오래 듣고 있기만 하면 뇌는 잠들어버린다. 장시간 팔을 들고 있으면 팔이 마비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은 한여름에 행진하는 군인들처럼 오래 멈춰 서 있을 수 없다.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게 생각이다.
-395~396
철학의 오래된 물음이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스스로의 생각에 지쳐 결국 누군가가 정해놓은 철학에서 답을 찾으려는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길 소망했다. 약간 자기 조롱조의 표현이었던 ‘삶으로부터의 휴가’를 얻었을 때, 안식을 주는 것은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람된 얘기 같지만, 어떤 나이에 이르면 인생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지나간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 남은 의지를 끝까지 불사르기 시작해야 할 날이 저만치 앞에 있고 연기할 수도 없다.
-396~397
특성 없는 남자에게 특성을 가지라는 요구는 커다란 도전으로 계속되는 것 같다. 제풀에 지쳐 결국 하나의 특성에 매몰되어 그것이 옳다고 믿으며 살아가야 하지 않냐는 도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