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상자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21)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by 유병천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72. 수염 뒤에 가려진 과학의 은근한 웃음, 또는 악과의 장황한 첫 만남


직업 이데올로기는 모두 고상한 법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도 자신을 야생동물의 살육자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사냥 관습에 충실한 동물과 자연의 친구라고 부른다. 장사꾼도 스스로를 정직한 이윤의 원칙을 수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도둑 역시 상업의 신, 즉 각 민족을 국제적으로 연결하는 고결한 메르쿠리우스를 자신의 신이라 부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그리 믿을 것이 못 된다.
과학이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 과정을 추적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하다. 지금은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문맹자조차 학술적 용어로 무장한 무수한 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과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67


직업 이데올로기가 모두 고상하다는 말에는 정말 공감한다. 다른 사람의 직업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기도 하다. 집안일을 하는 주부에게도 주부만의 직업 이데올로기가 있다. 자신의 직업을 가볍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직업을 떠나서 어떤 일을 직접 해보기 전에는 그것을 제대로 알 방법이 없다. 100년 전에도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니. 1974년에 태어난 나로서는 경이로울 따름이다. 물론 당시에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상상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갈릴레이나 그 정신적 동지들의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에서 기차 시간표, 산업용 기계, 생리학적 심리학, 혹은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현재의 도덕적 타락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468


종교의 시대에 종말을 고한 건 과학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정신적 인간들이 사실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기 전에는 군인, 사냥꾼, 상인, 즉 교활하고 폭력적인 인간들이 사실을 독점하고 있었다. 생존경쟁에서는 어떤 형태의 감상적 사고도 허용되지 않고 오직 적을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죽이려는 욕망만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실증주의자다. 사업 영역에서도 확고한 길로 나아가지 않고 무언가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결국 이윤이야말로 주변에 들끓는 적을 심리적으로 제압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발견을 이끌어내는 특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전통적인 배려와 심리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 용기, 모험욕과 파괴욕, 도덕적 성찰의 배제, 아무리 작은 이익이라도 끈기 있게 흥정하려는 자세, 필요하다면 목표를 향한 길 위에서 보여야 할 끈질긴 기다림, 모든 모호한 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불신의 표현인 척도와 숫자에 대한 경배가 그런 것들이다. 달리 말해서, 단순히 정신적인 것으로 옮겨지고 미덕으로 해석되었을 뿐 옛 사냥꾼, 군인, 상인의 예 악덕이나 다를 바 없다.
-469


권력이 자본으로 이동하는 것을 시사한다. 필요하다면 목표를 향한 길 위에서 보여야 할 끈질긴 기다림. 아마도 미래를 예측하고 변화의 방향을 설정한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은 인내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이라도 병영에 집어넣으면 여드레 안에 하사관의 호령에 벌떡 일어서게 되고, 또 소위 한 사람과 병사 여덟만 있으면 세상의 그 어떤 의회도 단숨에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다음과 같은 모범적 표현을 발견했다. 즉 그 어떤 이상주의자라도 입에 피마자유를 몇 숟갈 흘려 넣기만 하면 완강하게 굽히지 않던 신조를 쉽게 포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474


인간의 나약함은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아프기 전에 아픈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치기 전에 몸이 불편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73. 레오 피셸의 딸 게르다


“게르다가 나 보고도 구닥다리라고 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나이 든 사람의 말을 듣지 않거든요. 그게 젊은 애들의 원칙이죠.”
-479


예나 지금이나 젊은 사람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반바지 입고 학교에 가면 안 되냐고 외치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들에게 꼰대 소리를 들을 위기에 처하기 마련이다.


74. 기원전 4세기 대 1797년. 울리히가 다시 아버지의 편지를 받다


오성과 이성이 충분히 발전하면 숙고와 그 숙고에서 비롯된 결정의 형태로 욕구가 충동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의지에 따른 행동은 항상 사고와 연결되어 있지, 본능에 따른 행동이 아니다. 만일 자신의 의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반면에 인간적 욕구, 즉 감각적 본능에서 비롯되는 욕구가 있고, 그게 사고에 장애를 일으키면 그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다. 의지 작용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에서 나오는 자기 결정이다. 따라서 의지는 사고 속에서 결정되고, 그 사고에 장애가 생길 경우 의지는 더는 의지가 아니고, 인간은 오직 본능적 욕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492


소설가인지 심리학자인지 모를 정도로 해박함에 놀라며 책을 읽는다. 자신의 의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린 힘겹게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경험적 세계에서는 일부가 병들고 일부가 건강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법의 논리에서는 동일한 행위에 있어 두 법적 상태가 뒤섞인 상태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493


법의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가. 사기꾼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거짓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일이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75. 슈툼 폰 보르트베어 장군은 디오티마 방문을 직무상의 유쾌한 기분전환으로 생각하다


“우린 정말 뛰어난 분들을 모시고 싶어요.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얼마나 다양한 제안들이 쏟아지는지는 상상조차 못 하실 거예요. 하지만 그중에서 최고의 제안을 찾아내야 하죠. 장군님은 질서에 대해 말했지만, 질서나 객관적인 숙고, 비교, 심사를 통해서는 결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 거예요. 해결책은 섬광 같은 번뜩임, 열정, 직관, 종합적 사고일 수밖에 없어요!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는 논리적으로 발전해 온 게 아니에요. 오히려 갑작스레 영감이 떠오르는 한 편의 시에 가까워요! 그 영감의 의미는 나중에야 밝혀질 테고요.”
-498


디오티마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그 섬광 같은 번뜩임도 결국 엄청난 연구와 고민 끝에 도달한 상태라는 사실이 아닐까. 직관이란 것도 직감과 다르게 많은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합쳐질 때 비로소 발현이 되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76.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다


백작은 스스로 ‘글 나부랭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명백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 신문, 선정성에 굶주린 출판인, 그리고 무기력한 소리만 지껄여대면서 돈이면 뭐든 다 하는 자유주의적 시민계급의 정신과 연결된 표상이었다.
-499


권력자와 작가의 관계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라인스도르프 백작도 권력의 편에서 글을 쓰지 않는 작가를 싫어한 모양이다.


나는 많은 점에서 당신 사촌에게 경탄합니다. 그게 책임지기 어려운 과장된 말이라고 한다면,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적으로 경직되고 특이한 많은 면들 외에 이제껏 유사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면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신을 어디로 몰고 가는지도 모른 채 항상 모험을 찾는, 고도의 지력과 미숙하고 이질적인 도덕성을 함께 지닌 위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502


아른하임이 울리히에 대해 말한다. 울리히가 내적으로 경직되었다는 그의 말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울리히가 독특한 인물로 비칠 거란 생각에는 공감한다.


77. 언론인들의 친구 아른하임


만일 플라톤이 오늘 갑자기 편집국을 방문해 자신이 실제로 이천 년도 더 전에 죽은 그 위대한 문필가임을 증명한다면 당연히 엄청난 주목을 받고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자는 제안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삼 주 안에 그가 철학적 여행서를 한 권 쓰거나 그의 주특기인 짧은 이야기를 수없이 쏟아낼 수 있다면, 혹은 그 유명한 옛 작품들 가운데 한두 편이 영화화된다면 장시간 상당히 인기를 누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만일 그의 귀환에 쏠렸던 대중의 관심이 식고, 이제 플라톤 씨가 그전에 한 번도 제대로 관철하지 못했던 자신의 유명한 이념들 가운데 하나를 실현하겠다고 나서자마자 편집국장은 그냥 가끔 신문 오락 섹션에 적당한 문예 칼럼이나 써보라고 할 것이다. 그것도 독자들의 수준을 고려해서 가능한 한 느슨하고 경쾌하고 어렵지 않은 문체로 말이다. 그러면 옆에 있던 문예 팀장은 안타깝지만 그런 원고는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실을 수 없을 거라고 덧붙일 것이다.
-503~504


유행에 민감한 출판 시장은 요즘의 출판 시장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깜짝 놀랐다. 전업 작가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오늘날엔 온갖 말들이 뒤죽박죽으로 쏟아지고, 사람들이 바빠서 구분할 시간조차 없는 작은 차이만 제외하면 예언자와 사기꾼이 똑같은 말을 사용하고, 신문 편집국은 사방에서 천재를 자처하고 나서는 사람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이런 세태에서는 한 인간이나 한 이념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504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하여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정보의 생산자가 당시보다 다양해졌을 뿐이다. 무엇을 믿고 사느냐는 결국 개인의 선택이다.


“한 남자의 진정한 의미는 대부분 동시대인들의 이해를 얻느냐에 달려 있다.”
-506




78. 디오티마의 변신


만일 예전에 사람들이 디오티마를 잠에서 깨워 그녀가 원하는 것을 물었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생동감 넘치는 영혼의 사랑에는 온 세상에 자신을 나누어주려는 욕구가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몇 번 깨어난 뒤에는, 오늘날처럼 문명과 오성으로 과도하게 뒤덮인 세상에선 고도로 섬세한 본성을 지녔다고 해도 사랑의 힘과 유사한 노력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다는 말로 앞선 대답에 조심스럽게 단서를 달았을 것이다.
-513


사랑의 힘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랑의 종류도 다양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혼란의 시기에 그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


79. 졸리만이 사랑에 빠지다


졸리만의 눈에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라헬의 옷에 입술을 묻으며 격정적으로 울음을 토해냈다. 라헬은 허벅지에 뜨거운 물기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치마에 얼굴을 묻은 소년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다. 살아오면서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525


이렇게 1권이 끝난다. 2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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