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그녀는 울리히가 퍽 의아했다. 솔직한 인상, 반듯한 이마, 차분하게 숨쉬는 가슴, 사지에 깃든 자유로운 유연성만 보면 그런 몸에는 악의적이고 음흉한 생각과 뒤틀린 육욕이 담길 수 없었다. 심지어 자기 가문의 일원 중에 이런 훌륭한 외모를 가진 인물이 있다는 사실에 내심 자부심까지 들었다.
-437
울리히는 디오티마가 설명으로도 근사한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멋진 인물이 특성을 갖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면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육체는 결국 우리 정신, 우리 이념, 우리 예감과 계획의 몸이 아닐까? 혹은 아무리 예쁜 몸이라고 해도 우리 어리석음의 산물이 아닐까? 울리히는 이 어리석음을 사랑했고 아직도 일부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이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몸을 집처럼 편안히 느낄 수 없었다.
-442
정신과 육체 사이의 논의는 오래된 철학의 질문이기도 하다. 울리히는 현대의 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육체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육체를 벗어난 정신을 쉽게 상상할 수 없으니 말이다.
누군가 평생 열정적으로 요구하던 일이 갑자기 실현된다면 그 사람은 당혹스러워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가톨릭교도들에게 별안간 신의 나라가 도래하고, 사회주의자들에게 이상적 미래 국가가 찾아온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진정 자신들이 원하던 것인지는 아무도 증명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은 요구하는 데만 익숙할 뿐 그것이 실현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요.
-446
추상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것을 우린 목격할 기회가 없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느닷없이 그러한 상상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투명인간으로 하루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할까? 이런 질문도 상상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것도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둥근 지구는 성격이 아주 히스테릭해요. 지금은 사람들을 먹이고 키우는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곳이 얼음이었을 때는 고약한 소녀처럼 냉혹하고 차가웠죠. 또 그보다 몇천 년 전에는 양치류로 뒤덮인 무더운 숲과 뜨거운 늪지대, 무시무시한 동물들이 이곳에 가득했습니다. 세계가 점점 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해왔다고도 말할 수 없고, 세계의 진정한 상태가 무엇인지도 말할 수 없습니다.
-448
고약한, 완전한, 진정한 등의 형용사를 마주하면 인간은 세계를 상상으로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은 미래라는 추상적 미래를 상상하며 현실을 파괴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짧게 살아가는 곳이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가 아닐까.
당신도 알 거예요. 한 늙은 남자, 그리고 한 젊은 여자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아빠는 문득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나봐요. 부드럽게 내 손을 잡더니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두 번 쓰다듬었어요. 그러고는 말없이 나가버렸어요. 자, 우리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주실 거죠?!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458
클라리세 아빠는 클라리세의 친구와 사귄다. 울리히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나중에는 자신의 침실에도 아빠가 왔었다고 말한다. 클라리세의 이야기를 들은 울리히가 나중에 어떤 견해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개개의 정신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정신은 괴테, 미켈란젤로, 나폴레옹, 루터 같은 방식으로 경탄받기를 바라는 반면에, 마취제같이 정말 중요한 축복을 인류에게 선사한 사람의 이름은 오늘날 거의 누구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가우스, 오일러, 맥스웰의 삶에서 슈타인 부인과 같은 존재를 연구하는 사람도 없으며, 라부아지에나 카르다노가 어디서 태어나 어디서 죽었는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463~464
사람의 인정욕구에 관한 이야기를 내 오래된 질문 중 하나이다. '사람은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가는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는가?' 현재까지의 내 대답은 둘 다이다. 사람마다 비중이 다를 뿐 내면에는 두 가지의 욕망이 모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스스로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마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사람보다 일에 주목하는 곳에서는 이상하게도 항상 일을 이끌어갈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는 반면에, 일보다 사람에 주목하는 곳에서는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거기에 충분한 인물은 더 이상 없고 진실로 위대한 것은 과거에나 있다는 감정이 생겨난다!?
-465
오늘날 기업이 사람보다 일에 주목하는 곳이 아닐까. 일을 이끌어갈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니까 말이다. 물론 새로운 사람을 찾지 못하면 망하는 곳도 있다. 이런 경우 영광은 과거에만 존재할 테니까 말이다.
‘행동의 인간이 말의 인간을 만나면 늘 뼛속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비관주의 아닐까?!’
-466
말만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그럼에도 입만 달고 사는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된다. 피하고 싶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