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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Aug 19.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24)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85. 슈툼 장군이 민간 정신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애쓰다


만일 우리가 현대적인 정신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면, 나는 요즘 신문사나 다른 비슷한 데서 흔히 하는 설문조사처럼 각 연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지를 보냈을 거요. 투표 결과를 백분율로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말이오. 하지만 군대에서는 그게 안 되오. 황제 폐하라는 답 말고는 나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꾸어, 어떤 책이 가장 많이 읽혔고, 어떤 책이 가장 많이 인쇄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소.
-59


군대라는 조직의 속성은 어느 나라든 비슷한 것 같다. 말타기를 잘하지 못하는 슈툼 장군은 꽤나 현명해 보인다. 뻔한 대답을 피하는 방법을 잘 알고 질문을 바꿀 줄 아는 걸 보면 말이다. 살면서 궁금하지만, 직접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만나곤 한다. 그때 슈툼처럼 대답하는 사람이 곤란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센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이념들의 전체 지형에 통일성을 부여하려고 정말 갖가지 시도를 다 해보았소.” 늘 삶의 유쾌함이 배어 있던 그의 두 눈에 혼란과 불안 같은 것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어찌 됐는지 아시오? 꼭 이등칸 차표를 끊고 갈리시아로 여행하다 사면발니에 옮은 것 같았소. 내가 아는 가장 더럽고 무기력한 느낌이라고 할까? 이념들 속에 오래 있다 보면 온몸이 가려워 미칠 지경이오. 피가 날 때까지 긁어도 도무지 개운치가 않소!”
-62


슈툼 장군은 이념들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소설 속에서 슈툼이 맡은 역할은 질서인 것 같다. 군인이라는 직업도 그렇고 무언가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습관 또한 그렇다. 사람의 생각을 과연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같은 현상을 마주하고도 양가감정이 드는 것이 인간이다. 캐서린 쿡 브릭스(Katharine C. Briggs)와 그녀의 딸 이자벨 브릭스 마이어스(Isabel Briggs Myers)가 칼 융의 성격 유형 이론을 근거로 만든 MBTI의 경우 16가지로 성격유형을 분류하여 설명했다. 유형 테스트에서 나온 성격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그 사람의 성격을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사람은 외향적이면서도 내향적이고, 분석적이면서 때론 감정적이다.


“일단 제 말씀을 끝까지 들어보시죠. 대략 백 년 전이었을 겁니다. 독일 민간 사회의 지도적 인물들은 민간의 사상가가 책상에 앉아 머릿속으로 세계의 법칙들을 추론해 낼 거라고 믿었습니다. 삼각형에 관한 수학적 정리를 증명해 내듯이 말입니다. 당시의 사상가는 중국 무명으로 짠 바지를 입고 머리를 완전히 뒤로 넘기고, 전기나 축음기는 물론이고 아직 기름 램프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그런 오만함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추방되었습니다. 그 백 년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연,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세세한 부분에 대한 이해는 늘고 전체에 대한 이해는 떨어지면서, 부분들이 이루는 개별 질서만 많아지고 전체 질서는 점점 적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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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후 인류는 점점 신빙성 있는 결과를 더욱 믿기 시작했다. 과학의 놀라운 발전을 경험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도 영향력이 많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믿는 경우가 많았다. 울리히가 말한 시대에도 세세한 부분의 이해는 늘고 전체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나 보다. 인터넷을 상상할 수 없던 시대였음에도 말이다. 과학이 가져다준 실용성의 결과 개별 질서만 많아지고 전체 질서는 점점 적어지고 있는 것 같다. 전체가 개별을 추구하고 개별이 다시 전체를 추구하는 현상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많은 선택지가 존재할 경우 단순함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86. 제왕적 상인, 그리고 영혼과 사업의 이해관계적 합병. 정신으로 이르는 모든 길은 영혼에서 출발하지만 누구도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당시 세계는 갖가지 방식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1913년 말경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마치 들끓고 있는 화산 가장자리에 사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비록 평화를 위한 시도들을 보면서 이 화산이 결코 다시 폭발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전반적으로 퍼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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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사전을 보면 1913년은 세계 대전의 빌미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시기라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묘사한 것 같다. 유발 하라리가 책을 통해서 오늘날에는 더는 큰 큐모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 중이다. 전쟁의 목적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대더라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떤 특성이 전쟁을 일으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면, 차라리 울리히처럼 특성 없는 남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음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 안에 무책임한 가장자리가 있어, 동화와 시가 기원할 뿐 아니라 온갖 기억이 뿌리를 내리고, 피로감을 주는 가벼운 도취와 알코올에 의해 마음이 풀어질 때, 혹은 어떤 마음의 동요가 예외적으로 그 지점을 환히 밝힐 때 그 유치한 기억들이 눈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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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이기엔 냉철한 사람이라도 마음속에는 소년이 살고 있을 수 있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파의 마음속에도 소녀가 숨 쉬고 있을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속성을 아른하임의 생각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골방에 갇혀 고독하게 글을 쓰는 시인이 아무리 혹독하게 애를 써도 주위에는 기껏해야 파리만 날아다닌다. 이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명료해서, 사람들이 인생 자체를 재료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순간에는 항상 예전에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모든 것이 “문학 나부랭이”정도로 비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예전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로 인해 초래되는 야단법석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작해야 허약하고 혼란스러우면서 대개 모순이 가득 찬, 스스로를 무력화시키는 작용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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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하임은 엄청난 부자임에도 글을 잘 쓰는 인물이다. 울리히가 신기하게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다. 돈의 관점에서 보면 시인은 가난뱅이로 비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시인 중에 글만 써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극히 드물 것이다. 반면 아른하임은 자신의 명성 덕분인지 내는 책마다 관심을 받는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유명인의 책을 발간하려는 출판사의 행위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 같다.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 즉 상업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끌고 새 시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언젠가 현존하는 낡은 권력을 대체할 소명을 타고났다는 것이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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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슈툼 장군의 역할이 질서라면 아른하임의 역할은 자본인 것 같다. 자본이 예술과 융합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권력까지 사로잡고 싶어 하는 욕망의 상징 말이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고독하게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펜이 절로 움직이면서 영혼에서 시작해 정신과 미덕, 경제, 정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각이 봇물 터지듯 콸콸 쏟아져 나왔다. 이 생각들은 보이지 않는 샘에서 찬란한 빛을 받으며 명쾌하고도 마법적인 조화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확장 열망 속에는 도취와 같은 면이 있었고, 그런 도취를 맛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에게 글쓰기의 전제조건이 되는 의식의 분화 작업이 일어나야 했다. 자신의 구상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배제하거나 잊어버리는 정신의 분화 과정이었다. 세계와의 연결고리인 타인을 앞에 두고 말을 했다면 아른하임은 결코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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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인물이지만, 작가로서는 참 부러운 이야기다. 고독하게 책상에 앉아 있으면 펜이 저절로 글을 쓰다니. 어쩌다 문학의 신이 왕림하여 일필휘지로 글이 나오는 경우는 있지만, 평소에는 글을 쓰려고 하면 책상을 정리하고 싶어 지거나, 온갖 잡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다 느닷없이 쇼핑을 하고 뭘 먹을까 고민하며 책상 앞을 떠날 때도 있다.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하는 날은 책상에 앉아 멋진 작품을 읽었을 때이다.


손에 잡히는 결과가 없다는 상실감과 목표한 게 빗나가면서 원래의 의도를 잊어버렸다는 불쾌감이 짓누르듯이 퍼져갔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들을 조망해 보면 충분히 만족해도 될 텐데 이제는 가끔, 날마다 점점 두꺼워지는 다이아몬드 벽 같은 이런 생각의 벽에 가로막혀 지금도 계속 영향을 끼치는 자신의 그리운 뿌리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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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특성 없는 남자>에는 '벽'이라는 단어도 자주 등장한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벽보다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무수한 벽 말이다. 아른하임의 벽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벽인 모양이다.


그의 내면에는 어린아이의 반항, 잔인할 정도로 순진한 오만함, 혹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이가 처음 공립학교에 들어갔을 때의 경악 같은 것이 치미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면 사랑에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의 상황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런 순간,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정신처럼 냉철한 우월감으로 다시 업무에 임하게 되면 무엇으로도 더러워지지 않는 차가운 돈의 이성은 사랑에 비해 엄청나게 깨끗한 권력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는 사랑의 포로가 죽을 때까지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빼앗긴 것에 난감해하는 순간이 찾아왔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세계적 사건이라는 게 뭐죠? 엉 푀 드 브뤼 오투루 드 노트르 암*……?” 디오티마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아른하임은 인생이라는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둘러싼 미미한 소음 같은 것 아닌가요'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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