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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Sep 12.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30)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00. 슈툼 장군은 국립도서관에 침투해 사서와 도서관 하인, 정신적 질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다


나는 아까 말한 그 도서관 하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소. 노인은 내게 칸트나 다른 비슷한 인물, 혹은 개념과 인식 능력의 한계에 관한 책을 읽으라고 권했소. 하지만 난 어떤 것도 더는 읽고 싶지 않소. 내 안에 무언가 묘한 감정이 드는 거요. 최고의 질서를 갖춘 군대에서 우리가 왜 매 순간 목숨을 희생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말이오. 물론 그 이유를 명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소. 아무튼 질서는 때가 되면 학살에 대한 욕구로 넘어가게 되어 있소.
-206


슈툼 장군은 국립도서관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사서가 아닌 도서관의 하인에게 관련 서적을 안내받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슈툼이 추천받고 싶은 인류의 사유를 담은 책이 과연 있을까? 얼마 전에 투치 국장의 부인이 비슷한 질문을 했다며 슈툼이 좋아하는 디오티마가 예약해 둔 책을 가져다준다. 위대한 정신에 관한 자료가 박사학위를 받은 사서가 아닌 도서관 하인으로 일하는 노인에게서 나오는 것에 슈툼은 씁쓸해한다. 그보다 지배자들은 직접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다. 군인은 그런 지배자를 위해서 목숨을 희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질서는 때가 되면 학살에 대한 욕구로 넘어간다는 슈툼의 말은 정말 섬뜩하다.


101. 적대적인 두 사촌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이런 말을 말합니다.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그 사람이 나를 끌어당긴다거나 내친다고 말하지는 않죠. 진실에 좀 더 가깝게 표현하자면, 나는 나를 끌어당기거나 내치는 능력을 그들 속에 일깨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거기서 또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들이 내 속에서 그런 특성을 끌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되죠. 여기서 어디가 먼저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신축성 있는 두 공이나 두 전기회로처럼 상호 간의 기능적 종속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당연히 오래전부터 그런 식으로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즉 우리를 둘러싼 감정적 자기장 속의 근본 인자라고 생각하길 좋아합니다.. 누군가 자신이 남을 단순히 따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인정하더라도 겉으로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능동적 행위인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220


마음에 닿는 말이다. 한참 동안 사랑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사람마다 말하는 사랑이 달랐고, 사람마다 느끼는 사랑도 달랐다. 그런데 끌어당김과 밀침은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고, 싫어하는 사람은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인 걸 보면 아주 당연한 욕망이기도 하다.


102. 피셸 집에서의 싸움과 사랑


‘그는 왜 한 번도 오지 않을까? 게르다는 울리히를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평행운동이 독일 민족의 정신적 몰락을 노리고 공격의 포문을 연 것이라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운동에 울리히가 동참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의 생각을 듣고 싶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기를 바랐다.
-228


울리히를 사랑하는 여성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피셸 이사의 딸 게르다도 울리히를 좋아하는 눈치다. 민족주의에 열을 올리는 게르다의 친구들을 보면서 피셸 이사는 안타까워하지만, 울리히가 게르다의 생각을 바꿔주길 기대한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것이 자식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돈은 인간에게 독립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가 받는 월급은 가계 유지와 미래를 위한 합리적 저축에 다 들어갔다.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선 본업 외에 뭔가 다른 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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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에도 월급쟁이의 급여는 여유로운 삶을 살기엔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 돈이 궁핍했던 젊은 날 주말에도 돈을 벌기 위해서 나갔던 때가 생각난다. 손과 발에서 물집에 터졌고 지쳐 쓰러져 잠들고 싶었지만, 밤에는 컴퓨터로 다른 일을 해서 또 돈을 벌어야 했다. 회사의 급여도 부족했고, 잠도 부족했다. 절약하며 힘들게 보냈던 그 시절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건 긍정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돌진했다는 점인 것 같다.


피셸은 시대의 좋지 않은 흐름과 어려운 사업을 한탄했다. 거기다 도덕의 일반적인 해이를 입에 올리면서, 물질만 중시하는 시대가 되었고 무슨 일을 해도 빨리빨리 하려고만 든다고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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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셸 이사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너무도 빠르게 변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피셸 이사의 감정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나의 부모 세대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모든 가치를 이겨버린 효율성의 시대를 살면서 빨리빨리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기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니까. 그래도 빨리보다 정확하고 꼼꼼함이 더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좋겠다. 물론 자본가들은 빠르고 정확하고 꼼꼼히를 원하겠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들의 정신이 어디서 왔는지는 새로운 질병의 등장이나 도박의 긴 당첨 번호만큼이나 알쏭달쏭했다. 옛 유럽의 이상주의적 태양이 지기 시작하고 그 하얀 정신이 어두워졌을 때 많은 횃불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졌다. 이념의 횃불이었다. 훔쳐왔거나 만들어낸 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 횃불들은 아래위로 너울거리는 자잘한 정신적 공동체의 불덩이들을 여기저기 생성시켰다. 그 결과 큰 전쟁이 일어나기 전 몇십 년 동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사랑과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었고, 특히 피셸 이사 집에 모인 젊은 반유대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랑과 공동체의 기치를 힘차게 내걸었다. 그들의 생각은 이랬다. 진정한 공동체란 내적 법칙의 결과다. 가장 심오하고 단순하고 완벽한 제일의 법칙은 사랑의 법칙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천한 감각적 의미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소유는 물질적 소유욕의 일환이고, 오직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해체시키는 작용만 할 뿐이다. 물론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다. 다만 개인이 엄격한 자기 책임하에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각각의 성격을 존중해 줄 수는 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들을 두고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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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다. 각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한다. 정치인들의 단골 언어인 국민을 위하여 같은 개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그 이념의 충돌에는 같은 것을 위한다는 말로 자신들이 행하는 폭력성이 감춰지는 걸로 착각한다. 슈툼 장군의 질서처럼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도 그와 유사한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슈툼의 말처럼 질서는 결국 학살에 대한 욕구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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