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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Sep 15.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31)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03. 유혹


“넌 너무 서둘러! 언제나 하나의 목표, 하나의 이상, 하나의 프로그램, 하나의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 하지. 하지만 결국 나오는 건 타협이고 평균일 뿐이야! 겨우 중간 정도의 것을 만들어내려고 항상 극단적인 것을 욕망하고 행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피곤하고 가소롭다는 생각이 안 들어?”
-247


울리히가 게르다에게 하는 말이다. 울리히는 게르다와 대화 중에 디오티마와의 대화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저마다 자신만의 가치를 이야기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말은 달라도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은 마음은 같을 것이다.


내가 항상 일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는 생각지 않고 어떻게 될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는 거지. 나는 이 둘의 차이를 알아. 어쩌면 그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가장 시대에 맞지 않는 특성일지 몰라. 오늘날만큼 지적 엄정함과 감정생활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던 시대는 없었기 때문이지. 심지어 우리의 기계적 정확함은 불행히도 삶의 부정확함을 적절한 보충물로 삼을 정도로 발전해버렸어.
-248


난 울리히를 가능성 인간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일이든 가능성을 전제로 하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여 나중에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에 관한 연장선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능성을 생각하는 삶은 얼마나 피곤할지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 심지어 울리히는 본인이 틀린 것이 아닐까 자문까지 한다. 가능성 인간형은 정말 피곤한 인간형이 아닐까.


104. 전투 상황에 돌입한 라헬과 졸리만


아른하임이 돌아오기 전에 주인의 수표책으로 거액을 인출해서 라헬과 함께 도망칠 생각이라고 했다. 이 정신 나간 악동도 돈 문제에서는 아이답지 않게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전에 자신의 신분증명서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265


라헬과 졸리만은 아른하임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호텔에 잠입한다. 큰돈을 훔쳐서 도망갈 계획이다. 아른하임이 알면 참으로 복잡한 심정이 들 것 같다. 어린 졸리만도 신분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걸 안 모양이다.


105. 고결한 사랑에는 웃음이 없다.


디오티마는 감사의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예술사적으로 최고의 모범을 상기시키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청혼에 이렇게 답했다. “몸으로 껴안는 사랑은 아득히 깊을 수가 없습니다……!” 엄정한 백합꽃 품속의 유혹적인 노란색처럼 다의적인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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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혼한 여성에게 청혼을 하는 문화라니. 투치 국장이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는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그나저나 디오티마의 대답도 범상치가 않다. 디오티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투치 국장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아른하임의 사랑을 바라는 것일까? 엄정한 백합꽃 품속의 유혹적인 노란색처럼 다의적이라니 혀를 내두르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티오티마는 이 문제가 자기규제나 금욕, 영웅적 절제 같은 고차원의 가치에 대한 이해 없이 전적으로 관능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른하임은 안타깝게도 그녀와 똑같은 견해였기에, 인간의 깊은 도덕적 비밀과 관련된 감각이 오늘날 거의 상실되었다는 말만 덧붙일 수 있었다. 이 비밀의 본질은, 인간은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을 허용하는 시대는 항상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했다. 금욕과 절제, 기사도, 음악, 도덕, 시, 형식, 금기,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삶에 일정하게 제한된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무한한 행복은 없다. 강력한 금기 없이는 커다란 행복도 없다. 사업 역시 이익만 좇아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 정도를 지키는 것이 현상과 권력의 비밀이자, 행복과 믿음의 비밀이자, 티끌 같은 인간이 우주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사명에 담긴 비밀이다. 아른하임은 이런 식으로 자세히 설명했고, 티오티마는 그저 동의만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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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서 난 '균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균형은 안정감이라는 단어를 호출한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결국 안정감이 아닌가. 연인에게나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불안정하거나 불완전한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면에서 적절한 균형이야말로 격동의 세월에 가장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당성은 어떤 오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의 온갖 위대성처럼 단순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도 단순했다. 그리스도도 단순했다. 위대한 정신은 늘 단순한 원칙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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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다고 표현한 의미에서 평소 생각하는 명료함이 생각난다. 복잡함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거나, 내용이 방대하고 어려우면 이해하길 거부하거나 회피한다. 많은 복잡함이 단순 명료함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가 많지 않던가. 다만 그 명료함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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