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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Sep 26.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33)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08. 구원받지 못한 민족들과 ‘구원’이라는 용어에 대한 슈툼 장군의 생각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간단히 시작해 볼 수 있는데, 선한 기독교이건 경건한 유대교인이건 희망과 안녕의 성 어느 층에서건 추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기 영혼의 발 위에 떨어졌다. 그건 모든 종교가 인간에게 삶을 설명하는 방식 속에 신의 불가해함이라 부르는 비합리적이고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을 미리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만일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만나면 인간은 그저 이를 기억하면서 만족스럽게 두 손을 모아 비비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자기 영혼의 발 위에 떨어지고 두 손을 비비는 것을 사람들은 세계관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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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더는 신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 같다. 슈툼은 불가해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신에게 빌던 시대가 지나갔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신이 정한 운명이 아니라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관점이 바뀌었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게 바뀐 세계관으로 인간은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일까?


문화는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에 쓸 자금을 마련해 두지만 결코 너무 많은 돈을 쏟아붓지 않고 오락과 자동차, 무기에 지출하는 액수보다 적당히 적은 액수를 지출하도록 엄정하게 신경을 쓴다. 또한 유능한 사람들에게 갖가지 길을 터주면서도 그들을 유능한 직업인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문화는 약간 저항하는 척하다가 모든 이념을 인정하고, 그리되면 그것은 저절로 반대 이념의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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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고 씁쓸한 이야기다. 유능한 사람을 직업인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걷은 세금은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지출한다. 문화가 이념을 인정하고 반대 이념을 형성한다는 말은 결국 대립의 양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가? 군인이라는 직업의 슈툼의 관점이 디오티마에게 불편을 주는 지점일 수도 있겠다.


강한 주먹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하다는 듯이. 그에게도 장교로서의 세계관이 있었다! 그 안에서 비합리적인 요소란 명예, 복종, 최고사령관, 복무규정 3조였는데, 이 모두를 종합하면 전쟁은 더 강한 수단을 지닌 평화의 연장이라는 확신으로 귀결되었다. 즉 전쟁은 세계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강력한 질서의 형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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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슈툼이 실체가 없는 평행운동보다 가장 확실한 군사력 강화에 신경 쓰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 더 강한 수단을 지닌 평화의 연장이라니.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슈툼은 말로 표현할 길 없는 연관 관계에 의해 질서가 살해 욕구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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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가 살해욕구로 이어진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지닌 슈툼에게 평화를 위해 군비를 늘려야 한다는 논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올법하다.


109. 보나데아, 카카니엔. 행복과 균형의 체계들


가슴의 어리석음이란 그 정황에 아무리 비판적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낭만적 정치 범죄만큼이나 명예롭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녀의 심장은 슈툼 장군의 삶에서 명예와 복종, 복무규정 3조나, 오성의 손이 닿지 않는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모든 정돈된 삶의 태도에 내재하는 비합리적 요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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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데아는 감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평행운동이라던가 질서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애인인 울리히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특성 없는 남자>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보나데아라는 인물이 가진 태도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심리 계좌를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방법을 갖고 있고, 그걸 통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즐거움이 날마다 생겨난다. 그런데 삶의 즐거움은 불쾌로 이루어질 수 있다. 종류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행복한 멜랑콜리도 있고, 본질 면에서 춤곡처럼 경쾌한 장례식 행렬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역으로 이렇게도 주장할 수 있다. 유쾌한 사람이 실은 슬픈 이들보다 조금도 더 행복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고 말이다. 행복은 불행만큼 애를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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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계좌의 상태에 따라서 행동이 변화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감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즐거움, 슬픔 등의 감정도 개인의 심리상태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이 두 가지 감정이 균형을 이루면 안정감이 느껴질 테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편을 초래한다. 극도로 이성적이거나 극도로 감정적인 사람을 피하고 싶은 심리도 존재하니까. 보나데아는 감정에 따라 행동이 변화하는 인물인 것 같다. 그나저나 행복은 불행만큼 애를 많이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만히 있을 때 행복한 것이 정말 행복한 상태가 아닐까.


모든 인간이 자기 등에 실린 짐을 당나귀만큼 끈기 있게 잘 지고 간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자기 짐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당나귀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은 당나귀 한 마리만 떼어놓고 본다면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행복(또는 균형, 만족감. 개인의 가장 내밀한 자동반사적인 목표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은 전체의 힘과 긴장이 관통하는 담벼락 속의 돌멩이 하나나 강물의 물 한 방물만큼만 자기완결적 구조를 갖추고 있을 뿐이다.
-299


삶의 무게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질까? 삶의 무게가 무거운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반대로 삶의 무게가 가벼운 사람은 행복할까?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순간이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다만, 행복에 관한 추억은 오래간다. 어쩌면 인간이 행복하려고 애쓰는 이유도 좋은 추억을 많이 갖고 싶어서가 아닐까? 행복을 결정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란 점은 심리 상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자기만의 균형에 맞게 사는 사람은 없고, 모두들 자신을 둘러싼 많은 층들의 균형에 기대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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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안정감, 완전성. 이 세 단어는 인간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데에 떼어낼 수 없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둘러싼 많은 환경과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 세 단어의 무게가 그토록 무겁나 보다.


그런 물건들은 우리가 빌려준 물질적 가치를 환상적인 이자를 쳐서 돌려주는 채무자와 비슷하다. 사실 세상엔 채무자 같은 그런 물건밖에 없다. 왜냐하면 확신과 선입견, 이론, 희망에도 옷의 그런 특성이 담겨 있고, 무언가에 대한 믿음과 생각,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음의 상태에도 그런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힘으로만 올바른 상태에 도달한 무념무상이라면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빌려준 자산을 우리에게 다시 돌려줌으로써, 우리에게서 출발한 빛으로 세계를 비추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누구나 자기만의 특별한 체계로 해결해야 할 과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대하고 다양한 기술로 망상을 만들어내고, 그 망상의 도움으로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과 함께 태연히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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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체계라는 영역에서 현재가 뿜어내는 특별한 기운으로 만들어지는 옷이라니. 우리가 입고 있는 천으로 만든 옷이 아닌 상상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옷 말이다.


인간이라면 바보건 현자건 할 것 없이 모두 이 상태에 이르는 자기만의 요령이 있다. 그뿐 아니다. 이 개인적인 요령들의 체계는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사회와 세계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균형 체계로 구축된다. 크게 보면 사회의 이런 체계도 동일한 목적에 이용된다. 이 맞물림은 우주의 모든 자기장이 지구의 자기장에 영향을 끼치는 우리 자연의 커다란 맞물림과 비슷하다. 우리가 그걸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그런 맞물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유발된 정신적 홀가분함은 어찌나 큰지, 지극히 현명한 사람들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들처럼 아무 걱정 없는 태평한 마음으로 스스로 현명하고 선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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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중력. 실제로 중력이 얼마나 강한지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높이 뛰기만 해 봐도 중력이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모든 인간적 믿음은 신용거래의 한 특수 형태일 뿐이다. 사랑과 사업, 과학, 심지어 멀리뛰기에서도 사람들은 승리하고 득점을 하기에 앞서 먼저 믿어야 한다. 이게 어떻게 인생 전반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어떤 질서가 아무리 뿌리깊더라도 배경에는 항상 그 질서에 대한 자발적 믿음이 깔려 있다. 그것은 곧 식물에서 새로운 성장이 시작하는 지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해명할 필요도 없고 보장할 수도 없는 이런 믿음이 다 소진되고 나면 곧 와해가 뒤따른다. 시대와 제국은 신용을 잃은 사업체가 망하는 것처럼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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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근사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삶은 모종의 믿음에 기반한다. 상대가 나를 사랑할 거란 믿음, 나를 해치지 않을 거란 믿음,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 국가가 나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 등 어느 하나 예외가 없어 보인다. 복잡한 세상에서 이젠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마주한다. 다양한 가치관과 돈이 보여주는 환상 속에서 과연 개인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까?


어쩌면 이렇게 말해도 될 듯하다. 좀더 높은 인간들의 자아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카카니엔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스스로를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착실한 식사 도구로 느껴온 그들은 역사의 도구라는 자신의 역할에 무척 놀라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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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위험한 생각을 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란 것을 카카니엔엔들은 모두 알고 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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