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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Oct 03.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34)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10. 모스브루거의 해체와 보존


진실은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크리스털이 아니라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무한한 흐름이다.
-315


거짓은 쉽게 말할 수 있고, 진실을 밝히는 데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수가 거짓을 믿어버린 상태라면 진실을 주장하는 사람이 오히려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증거, 논리, 정황 그리고 설득력이 합쳐져 진실이 드러난다. 주머니에 크리스털이 있다고 말해도 사람은 그걸 보기 전까진 믿지 않는다.


111. 법률가들의 사전에는 반쯤 미친 인간이란 없다


한 범죄행위는 법 전문가들의 지난한 정신노동과 비교하면 단순할 때가 많다. 피고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병적 상태로 넘어가는 일이 자연에선 무척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자주 들먹인다. 반면에 법률가는 그 경우 이렇게 주장한다. “자기결정의 자유나 한 행위의 범죄적 성격에 대한 사전 인지와 관련해서 긍정과 부정의 근거들은 어떤 사고 규칙에 따르더라도 배제와 상쇄 과정을 거쳐 단 하나의 문제적 판결만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률가는 논리적 이유로 ‘동일한 행위에 대해 결코 두 상태의 혼합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316


법률은 행위의 동기보다 결과를 우선한다. 속도위반으로 걸린 사람이 교통법규를 몰랐다고 해도 범칙금은 부과된다.


112. 아른하임이 자신의 아버지 자무엘을 신들의 반열에 올려놓고, 울리히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로 마음먹다. 졸리만은 왕족 아버지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어 하다


아버지도 때론 사업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기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패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일단 누군가 나폴레옹의 반열에 오르게 되면 패한 전투도 승리한 전투로 둔갑해 버리기 때문이다.
-328


전해지는 역사는 대부분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우린 과거를 온전히 알 수 없다. 이야기로 전해지는 내용과 상상력을 결합하여 재구성할 뿐이다. 역사 문제도 결국 무엇을 보고 듣고,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진실과 상관없이 무엇을 믿고 사는가에 따라서 가치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너는 직관이 뭔지 아느냐?
-329


직감과 직관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직관은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라고 적혀있다. 우스운 표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직관은 '그냥 딱!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벌이란 너도 알다시피 늘 그렇게 고결하지만은 않다. 끝없이 이해득실을 따지고 모든 것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노력은 과거 좀 더 행복했던 시절의 좀 더 고결하고 위대했던 삶의 이상과는 동떨어져 있지. 과거엔 살인도 고결한 용기의 미덕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돈으로 그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사실 의문이다. 이해타산 속에는 선도 품위도 깊은 본성도 없다. 돈은 모든 걸 추상적인 개념으로 만들어버리고, 불쾌할 정도로 합리적이다.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만, 나는 돈을 볼 때마다 불신에 가득 차서 검사하는 손가락이 떠오른다. 악다구니와 계산도 함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난 역겨워 견딜 수가 없다.
-329


자본주의 속에서 많은 다툼 끝에 남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닌가 싶다. 선도 품위도 깊은 본성도 없이 말이다. 돈에 욕심이 없다는 사람도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기품과 선함, 솔직함, 진실에의 용기,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용기, 즉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조급함과 질투, 미움, 자잘한 신경질적인 언사를 멀리할 줄 아는 용기를 잘 키워나가면 너는 분명히 상인으로서 네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에 단순히 상품만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삶의 혁신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이지.
-332


아른하임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려는 졸리만에게 용기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인간의 본성이나 습성을 바꿀 수 있을까? 이건 여전히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학습이나 타인을 만나서 변할 수 있지만, 결국 본인의 후회나 깨달음을 통해서 변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궁지에 몰리면 잘못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믿는다. 아마도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졸리만에게 아른하임이 운영하는 사업체 중 일부를 맡기려는 의도는 과연 실행될 수 있을는지.


아른하임이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아버지가 직관적으로 사업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던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직관이라는 것이 자기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쓰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고, 순간적인 속도가 빠르다는 말과 대략 비슷하게 사용되던 시절의 일이었다. 아무튼 당시에는 잘못된 일이나 정말 못마땅한 행동은 모두 직관 탓으로 돌렸다. 사람들은 요리할 때도 그렇고 책을 쓸 때도 직관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 늙은 아른하임은 아들이 그런 말을 하는 순간 깜짝 놀란 눈으로 아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333


나물 반찬을 할 때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끓는 물에 적당히 데친 후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하고 버무리면 된다고. 정량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계량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도 나물을 끓는 물에 너무 오래 두거나 너무 잠깐 담가서는 맛있는 나물 반찬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직관은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아른하임이 그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꼼꼼한 현실 전문가를 따라 두려워하게 된. ‘익살’이라는 불쾌한 감정을 어떻게 그런 비현실적 인간에게 적용했겠는가! ‘그러니까 그 인간에게는 전체적인 무언가가 없어!’ 아른하임은 생각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순간 마치 그 확신의 이면인 것처럼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 남자에게는 영혼이 있어!’
-338

이 책 표 4(뒤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는 현실을 얻고 꿈을 잃었다." 아른하임이 현실이라면, 울리히는 꿈일까? 아른하임는 울리히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사용하지 않은 신선한 영혼이 있다고 말하면서 직관적 영감으로 떠오른 영혼이 있다는 생각을 무슨 뜻으로 했는지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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