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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Oct 15.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35)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13. 울리히는 초월적 이성과 종속적 이성 사이의 경계 언어로 한스 제프, 게르다와 이야기를 나누다


인간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권리가 없는 존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후견인은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아이를 입히고, 재우고, 먹이고, 야단치고 벌준다. 또한 한스 제프의 말처럼 아이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기도 한다. 집에서 키우는 동물 이상으로 아이에게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법 조항의 경계를 지키는 한 이 모든 것은 허용된다. 아이는 부모의 것이다. 노예가 주인의 것이듯. 아이는 경제적 의존성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소유물이자 객체다. “아이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주의”(이 표현은 한스가 어느 책에선가 보고 나중에 살을 붙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냈다)는 그가 지금껏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자신의 순진한 사도 게르다에게 처음으로 강의한 내용이었다.
-346~347


한스 제프는 카카니엔에서 진행되는 평행운동이 못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청년이다. 피셸의 딸 게르다는 한스와 어울려 지내며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울리히를 좋아하는 게르다는 두 남자의 대립이 불편하다. 한스 제프가 게르다에게 이야기한 내용에 일리가 있지만, 부모의 맹목적 사랑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


아이는 창조적이다. 아이 자체가 성장의 화신이자 끊임없이 스스로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는 제왕적이다. 세계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 판타지를 집어넣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만의 이상적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347


흔히 동심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신체적 나이는 점점 늘어나지만, 가슴속에 동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한스 제프의 이야기처럼 아이는 창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른이라고 해서 아니,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모두가 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다만, 상식이라는 거대한 장벽 속에서 행동하는 방법을 습득하여 행할 뿐이다. 


우리는 인간에 내재하는 두 장벽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인간이 선하고 이타적인 행위를 할 때마다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 그만큼 낮은 벽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이보다 훨씬 큰 장벽은 지극히 이타적인 사람 속에도 끈끈하게 남아 있는 ‘아집’, 즉 자기에 대한 집착이다. 이는 원죄나 다름없다. 모든 느낌과 감정, 심지어 헌신의 감정조차 실제로는 ‘주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받는 것’에 더 가깝다.
-350


오래된 철학적 질문 중의 하나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선함을 오성을 사용할 용기로 살라는 칸트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이기심과 이타심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사항은 타인을 위한 행위가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아닐까라는 점이다. 우리는 기부나 봉사를 타인을 위해서 하는가? 아니면, 이타적인 행위 후에 오는 기쁨을 느끼기 위함일까?


사랑과 고행은 고독한 형제처럼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한자리에 모인 이 형제는 일상적 삶의 목표 및 목적과 비교하면 목표도 목적도 없지 않은가? 한편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은 원래 사수의 용어에서 왔다. 그렇다면 목표와 목적이 없다는 건 곧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 아닐까? 그래서 이 언어의 흔적, 즉 많이 지워졌지만 아직은 알아볼 수는 있는 흔적을 따라가기만 해도, 거칠게 변한 의미가 어떻게 곳곳에서 현재의 우리에게는 없는 무척 미묘한 관계들을 몰아냈는지 알 수 있다.
-356


어떤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경영에서도 전략과 전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전쟁 용어를 기업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하긴 식민지를 찾아 배를 띄우던 회사는 오래전부터 전략과 전술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짐승을 찾아 사냥을 하는 사냥꾼처럼 인간의 일상도 목표와 목적 없이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들게 한다.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겐 사수처럼 살아가는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114. 상황은 점점 첨예해지고, 아른하임은 슈툼 장군을 무척 자애롭게 대하고, 디오티마는 무한성의 영역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울리히는 읽은 대로 살아갈 가능성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오늘날 위대한 이념은 늘 수많은 저항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이념들은 겨우 서로의 남용을 막는 데만 도움이 될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념으로 무장한 도덕적 휴전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373


지성회의가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서로 인정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끝나가는 것처럼 다양한 생각을 하나의 위대한 이념으로 몰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무모하고 위험하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인구가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늘어났다는 말과도 같다. 하나의 이념으로 몰아가는 행위보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충돌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이 인정했듯이 인간에게는 자율과 책임을 넘어 지켜야 할 규범과 법이 필요하다는 점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적 휴전은 상식과 법률로 지켜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나요? 내가 대신 답을 드리죠. 당신은 자기 견해에 맞지 않는 부분은 생략해 버립니다. 작가도 작품을 쓰면서 당연히 그렇게 하죠. 당신은 꿈이나 상상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생략을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생략함으로써 아름다움이나 흥분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태도는 현실 한가운데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타협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감정들이 격정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서로 막으면서 약간 회색빛으로 섞이는 중간 상태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런 태도가 아직 없는 아이들은 그런 이유로 어른보다 더 행복하기도 하고 더 불행하기도 합니다. 나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무지한 사람들도 생략을 한다고요. 그러니까 무지하면 행복해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죠.”
-379


디오티마에게 울리히가 생략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은 자신이 듣고 싶은 부분만 듣는다. 아니, 심지어 같은 이야기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진실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사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다른 모든 개념들은 굳어버린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성성이라는 개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단순한 개념도 수많은 표상들 사이에서 얼마나 흔들리고 있습니까? 그것은 숨 쉴 때마다 형체가 바뀌는 숨결과 같습니다.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381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문장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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