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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Oct 25.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37)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17. 라헬의 검은 날


졸리만은 라헬의 소심한 마지막 키스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는 불을 켜고 싶었고, 이제 물건을 다 훔치고 여기를 빠져나가는 데만 관심이 있는 도둑처럼 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라헬은 초점도 없고 깊이도 모를 시선으로 졸리만을 바라보았다.
-429


라헬의 마음속에는 울리히가 있지만,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다. 아른하임의 하인인 졸리만과 애정행각을 벌인 후 라헬은 엄청 후회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118. 그를 죽여라!


그는 항상 자기보다 아니가 적은 그 친구에게 남모를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진취적인 면에서 자신이 뒤진다는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에겐 정신이 있고, 그 친구 속엔 거친 의지만 있다고 여겼다. 이들 사이에는 이런 견해를 강화시키는 관계가 존재했다. 즉 발터가 미와 선에 감동을 받았다면 울리히는 그것들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인상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
-439


발터와 울리히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다른 것 같다. 현실에 순응하는 것을 선택한 남자와 어떤 특성을 지니길 포기한 남자의 차이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깊이 있는 철학적 사고까지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특성을 선택한 사람이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 사람이나 혹은 특성을 가질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사람에게 느끼는 묘한 질투심이 있는 것도 같다. 오늘날에도 특성을 정한 후 살아가는 사람이 더욱 편해 보인다. 자신이 정한 신념과 다른 상대를 만나면 싸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가능성 인간처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가 됐건 무엇을 하건, 심지어 남들과 대립적인 상황에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남들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있어야 해.’ 대략 이것이 그가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발터는 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을 느꼈다. 심지어 논쟁을 할 경우에도 그들은 그에게, 그는 그들에게 끌렸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일에 균형을 맞추고 건실한 것에 상을 주고, 늘 끝까지 밀고 나갈 힘이 인간 공동체에 내재한다는 약간 진부한 생각이 그의 삶의 굳은 신조가 되었다.
-441


다수의 선택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발터는 군중의 흐름을 따르는 길을 선택한 후 그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을 한다. 현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자신이 선택한 신념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현상이다. 신기한 일은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등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곳에서 비슷한 현상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를 사랑해?!” 이것은 특별히 독창적인 발언도 아니었고, 둘 사이에 처음 언쟁을 불러일으킨 말도 아니었다. 발터는 클라리세가 미쳤다고 믿기보다 차라리 그녀가 울리히를 사랑한다고 믿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기희생적 믿음은 그가 지금껏 입술이 얇은 초기 르네상스의 미라고 경탄해 온 클라리세가 처음으로 그에게 추하게 느껴진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 추함은 그녀의 얼굴이 그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보호되는 게 아니라 연적의 거친 사랑에 노출된 것과 관련이 있을지 몰랐다. 여기엔 복잡한 문제가 충분히 뒤엉켜 있었고, 그것은 그의 심장과 눈 사이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446


클라리세는 정말 미쳤을까? 울리히와 클라리세의 대화를 보면 독특한 면은 있지만, 미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 성격 장애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면, 클라리세는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하나의 특성을 선택한 발터의 눈에는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클라리세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발터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 그것을 부인하면 자신이 선택한 신념이 무너지는 기분을 참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 이상의 천재적인 사람과의 사랑을 꿈꿨던 클라리세의 관점에서는 발터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을 것 같다.


119. 대항책과 유혹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울리히가 나직이 대답했다.
“아뇨, 당신 친구 아른하임이 당신 사촌을 속이고 있다는 걸 말하려고 왔어요. 그 남자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굴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목적이 있어요!”게르다는 아버지의 말을 전달했다.
-453


울리히 주변에는 여자가 많다. 모두가 울리히를 좋아한다. 게르다의 아버지 피셸이 아른하임이 갈라시아 유전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게르다를 통해서 울리히에게 전한다. 물론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게르다는 울리히를 유혹한다.


120. 평행운동이 소요를 부르다


발터가 던진 질문에 군중 속에서 다양한 답이 돌아왔다. 혹자는 이것이 위대한 애국 행렬이라고 답했고, 혹자는 너무 극렬한 애국주의에 반대하는 시위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사람들의 의견은 다음 문제에서도 갈렸다. 대다수의 믿음처럼, 이 대대적인 시위가 슬라브 계열의 소수 민족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는 정부에 항의하는 범게르만주의자들의 시위인지, 아니며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요에 반대 의사를 밝히기 위해 모든 애국적 카카니엔인들이 어깨를 걸로 나온 친정부 시위인지, 하는 문제 말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발터처럼 그냥 따라다니는 단순 참가자들도 있었다.
-464


평행운동이나 지성회의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아무런 결론 없이 흘러간 것처럼 시위도 다양한 의견 속에서 진행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저마다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거리에 나온 장면을 보니 각자가 가진 바람들을 숨긴 채 불만을 터뜨리기 위해서 나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인간은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그런 질문이 따라온다.


각자 다른 의지를 가진 개인들은 한순간에 단일한 의지를 군중으로 만드는 그런 변화가 어떻게 생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군중을 이루는 개인들이 대개 평생을 절제와 신중함이라는 것 속에서 살아오고도 어떻게 선악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재주만 있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재주는 없는 군중이 되는지 말이다.
-466


정말 신기한 일이다. 막연하던 것이 하나로 응집하는 일은 순간에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면에는 그러한 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말이다. 개인의 욕망 혹은 소수 집단의 욕망을 군중의 힘을 빌어서 이루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말이다. 군중은 자신이 역사적인 변화에 동참하고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지금껏 지상의 모든 혁명에서는 늘 정신적인 인간이 피해를 봤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이란 무릇 새 문화를 만들어내겠다는 약속으로 시작해서 인간 정신이 그때까지 이루어낸 것들을 마치 적의 소유물처럼 일소하고, 기존의 낡은 고지를 넘기 전에 다음 혁명에 추월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명시대라 부르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실패한 시도들의 기나긴 우회로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474~475


새로움이란 것은 현존하는 것과의 공존을 바탕으로 생겨난다. 완벽하게 새로운 것이 과연 있을까? 기존의 질서의 저항하는 힘과 새로운 힘의 갈등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갈등이 생겨나고 또다시 소모의 시간이 되풀이된다. 


실권을 잡고 나서도 계속 반대만 하는 야당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476


100년 전 유럽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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