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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Oct 27.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38) 2부 끝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21. 대담


“난 도무지 당신을 이해하니 못하겠어요. 글을 쓰는 것보다 삶을 직접 장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477


아른하임이 울리히에게 말한다. 울리히는 아른하임에게 글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른하임의 말처럼 삶을 장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혹여 자신이 삶을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더라도 과연 그게 사실일까? 지구에 살아가는, 아니 살다 가는 사람이 과연 삶을 장악하며 살 수 있을까? 물론 개인의 삶을 장악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살 수는 있다. 그건 미시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전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이 관장하는 세계는 오로지 자신의 것이다. 울리히는 아른하임의 세계를 하나의 작은 세계로 생각할 것 같다. 작은 세계 속에 들어가서 살아가려고 마음먹었다면, 아마도 어떠한 특성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두 개의 그런 힘, 즉 실권을 가진 위임자와 그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집행기구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도덕적이건 비도덕적이건, 아름답건 추악하건 수익을 높이는 일이라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현상이 저절로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여기서 ‘저절로’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 현상이 인간의 성향과는 별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483


자본이 추구하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이 자본과 돈을 혼용하며 사용한다. 하지만, 자본과 돈은 그 의미가 다르다. 돈은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의미라면, 자본은 투자를 통한 가치 창출에 의미를 둔다. 월급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 돈이라면, 아이템을 발굴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자본이다. 아른하임은 자본을 투자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울리히는 그것과는 거리가 많아 보이는 인물이다.


모스부르거의 경우도 그래요. 그 사람은 결국 수천 명이 바라는 대로 죽을 겁니다. 사람들이 그를 죽이라고 외쳐댈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들 중 세 사람만 손에 피를 묻히면 되기 때문이죠! 기교적으로 완벽하게 발전한 이런 ‘간접성’ 덕분에 오늘날 개인뿐 아니라 전 사회도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사람들이 누르는 단추는 항상 희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단추와 연결된 선의 반대편 끝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단추를 누를 필요가 없는 다른 사람들이 겪을 일입니다. 이 시스템이 역겹지 않습니까?
-484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생각나는 구절이다. 사람에게 도덕을 지킬 수 있도록 강제하는 처벌의 모습은 시대마다 달랐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울리히의 말이 다시 한번 생각난다. 500년 전에 살다 간 몽테뉴도 시대마다 다른 가치를 이야기했다. 기교적으로 발전한 간접성이라는 표현이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온다.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워지는 이유가 간접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의식은 세계의 우글거리고 빛나는 것에 질서를 부여할 수 없다. 의식이 날카로워질수록 세계는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점점 더 무한해지기 때문이다.
-494


이해가 어려운 무척 어려운 문장이다. 의식이 날카로워질수록 세계가 무한해진다니.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일까?


이 시대의 ‘새로운’ 사람들은 너무 경제적으로만 생각해요. 가업이 2세대나 3세대로 이어지면 후손들은 상상력을 잃습니다. 그리되면 철두철미한 행정가밖에 나오지 않죠. 금속공, 사냥꾼, 장교, 귀족 사위들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세계 곳곳의 그런 사람들을 압니다. 그중에는 똑똑하고 고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내가 방금 실러의 말을 인용해 지적한 불안과 고립, 어쩌며 불행과도 관계된 생각을 하나도 해내지 못하더군요.”
-497


100년 전의 새로운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더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합리주의와 실용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예견한 것 같다. 상상력을 잃는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힘을 잃는다는 말과도 같다. 새로운 패러다임도 어떤 한 사람의 상상력에서 시작한다.


122. 귀갓길


과거의 자신이 자기만족의 순간에 마치 접착제가 말랐거나 떨어진 것처럼 옛 사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남들의 경우엔 잘 떨어지지 않는 이 접착제가 대체 어떤 성질이기에 자신에게서는 잘 떨어지는지 자문해 보는 울리히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500


아무리 좋은 접착제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 기능을 상실한다. 튼튼하다고 믿었던 등산화도 오랜 시간 동안 신발장에 놓아두었다면, 산에서 밑창이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런 낭패감을 맛본 사람이 울리히가 아닐까? 믿고 있던 신념이 시간이 지나거나 혹은 깊이 있는 사색 끝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기분 말이다.


‘인간은 누군가이고, 그 누군가로서 무언가를 체험해, 하지만 수없이 많은 체험이 존재하는 도시에서는 더는 그 체험들을 자신과 연결시킬 수 없어. 그래서 그 악명 높은 삶의 추상화 작업이 시작되는 거야.’
-501


여러 번 이야기하듯 너무 복잡한 명제가 주어지면 의외로 단순한 해답을 찾게 된다. 5만 종이 넘는 와인을 전부 맛보고 난 후 가장 좋은 와인은 이거였어! 이런 시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의 와인을 마셔본 후 나에게 맞는 와인은 바로 이거야!라는 결정을 내리고 이야기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소설 속의 이야기꾼이다. 그들은 보통 서정시를 사랑하지 않는다. 혹은 일순간만 사랑한다. 그들은 삶의 실에 ‘왜냐하면’과 ‘무엇을 위해’를 조금 삽입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모든 생각은 혐오한다. 그들은 사실들의 정연한 연속을 사랑한다. 그것이야말로 필연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하나의 ‘경로’가 존재한다는 감정을 통해 자신이 혼돈으로부터 어떻게든 보호받고 있다고 느낀다.
-503


인간의 사고 체계가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방어기제' 같은 단어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말이다. 울리히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 하나의 경로가 존재한다는 감정으로 보호받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123. 반전


마치 삶의 길이란 오직 이것들 사이에 난 길인 것처럼. 운명은 인간의 생각과 의지가 아닌 이 비밀스럽고 어느 정도는 터무니없는 이미지들을 따른다.
-524


울리히의 관점을 읽으며 사색할 때, 인간의 삶은 너무도 짧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에 분노하고 흥분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순간순간을 몰입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나마 인생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가정할 땐 울리히처럼 가능성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삶은 역설적으로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울리히는 인생의 무의미함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일 것 같다.


기나긴 2부가 이렇게 끝난다. 3부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폭넓은 사유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성 없는 남자>는 정말 매력이 넘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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