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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Nov 02. 2023

제3부 천년제국으로(범죄자들)(1)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3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 잊고 있던 여동생


나중에 여동생이 첫 남편을 무척 사랑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데 ‘무척 사랑했었다’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자주 쓴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고, 울리히는 두 번째 남편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싫었다. 이게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었다.
-13


울리히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3권을 시작하며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가테이다. 무질은 울리히의 동생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된다. 형제나 남매 사이라도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의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청소년기를 지나면 각자의 관심분야를 찾아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울리히와 아가테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 같다. 아가테의 첫 남편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난 남편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다.


하인은 아가씨가 편두통이 있어서 박사님이 오시면 깨워달라는 부탁과 함께 점심을 먹고 바로 쉬러 갔다고 했다. 울리히는 동생이 편두통을 자주 앓느냐고 묻고는 곧바로 이 미숙한 질문을 후회했다. 아버지 집의 오랜 충복 앞에서 그냥 침묵으로 넘겨도 좋을 법한 가족 관계나 자신이 느끼는 거리감을 노출시킨 것은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다.
-15


오래 떨어져 있던 남매가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오래간만에 만나는 남매간의 대화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까? 오빠를 마중조차 나오지 않은 아가테는 어떤 인물일까?


2. 신뢰


그녀는 처음엔 이해든 몰이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했고 신뢰받길 원했으며, 솔직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오빠를 확고하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아직 도덕적인 가르침의 욕구에 빠져 있던 울리히는 동생에게 바로 져줄 생각이 없었다. 영혼의 힘에도 불구하고 그는 머리로는 비난하는 선입견에서 늘 자유롭지 못했다. 현실 삶은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게 하면서도 정신적 삶은 다르게 이끌 때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29


삶의 의미를 찾는 것 중 인정욕구는 제법 비중이 높아 보인다. 아가테도 오빠의 인정을 받길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는 쉬운 방법으로 동생과 친해질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신뢰'라는 단어는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말인가. 상대를 신뢰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신뢰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은 타인을 쉽게 의심한다.


3. 상가에서의 아침


세상에는 상반된 두 개의 거대한 개념 집단이 있다. 하나는 경험적 내용에 둘러싸여 있고, 다른 하나는 경험적 내용을 둘러싸고 있다. 이에 기초해서 논문은 ‘내면의 존재’와 ‘외부의 시선’, ‘오목렌즈적 감각’과 ‘볼록렌즈적 감각’, ‘공간성’과 ‘물질성’, ‘내적 자성’과 ‘외적 관찰’이 수많은 대립적 경험과 그것들의 언어적 비유 속에서 반복된다는 확신을 내비친다. 그 배경에 인간 경험의 원시적 이중 형식이 있다고 추정해도 좋을 만큼.
-35~36


인간의 갈등 중 내면의 존재와 외부의 시선에 관한 사항은 많은 생각을 가져온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 간극이 클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사색해 보면 둘 다 '나'이다. 우린 생각과 행동이 같다고 상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진중하면서도 경솔하고, 유쾌하면서도 우울하고, 이타적이면서도 이기적이다. 위험한 사고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이 양가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스스로 합리화시키면 안 된다.


대학에서는 장례 절차에 대해 문의했고, 한 고물장수는 고물로 내놓을 옷이 있는지 쭈뼛쭈뼛 물었으며, 한 독일 회사의 위탁을 받고 왔다는 고서 수집상은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하면서 혹시 고인의 서가에 있을 희귀한 법학 서적을 살 수 있을지 의사를 타진했고, 주임 신부를 대신해 온 보좌신부는 교구 기록부상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다며 울리히와의 상담을 요청했고, 생명보험 직원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설명하고자 했으며, 어떤 이는 피아노를 싸게 사길 원했고, 한 부동산업자는 집을 팔 의향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고 갔고, 한 퇴직 관료는 편지 봉투에 주소 쓸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했다.
-40


한 사람의 죽음 뒤에 직면하는 현실은 슬픔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평생 법률을 연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살다 간 울리히의 아버지의 인생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는 적잖이 놀란 눈으로, 숲 속에 죽어 누워 있는 딱정벌레 한 마리와 그리로 다가가는 다른 딱정벌레들과 개미, 새, 팔랑거리는 나비들을 지켜보았다.
숲 속 짙은 어둠 속으로 죽은 자를 찾아가는 이 발걸음 곳곳에도 이익 추구의 열성이 섞여 있었다.
-40~41


딱정벌레와 인간의 죽음을 비유하는 문장이다. 곤충이나 인간이나 이익 추구의 열성이 섞여 있다는 말이 씁쓸하다.


울리히는 한 인간의 삶에서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이 잿더미에 놀라워했다.
-43


어린 왕자가 방문한 여섯 번째 별에서 지리학자에게 물어보는 장면이 생각난다. 덧없다. 어린 왕자는 집요하게 덧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묻는다. 지리학자가 대답한다. "그것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 염려가 있다는 것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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