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3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아주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당시에는 내면과 외면이 아직 거의 분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 내가 무언가로 기어가면 그 무언가는 내게 날아왔어. 우리에게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만 흥분한 게 아니라 사물들도 흥분으로 들끓기 시작했지. 우리가 나중보다 그때 더 행복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냐.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을 갖고 있지 않았어. 사실 우린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어. 우리의 개인적 상태들이 외부 세계와 아직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으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감정과 욕망, 그래, 바로 우리 자신이 아직 우리 속에 완전히 존재하지 않았어. 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어. 그때까지는 우리 자신과 완전히 멀어지지 않았었다고, 너 자신을 완전히 갖고 있다고 믿는 지금, 새삼스럽게 네게 정말 누구냐고 스스로 묻게 되면 그걸 알게 될 테니까. 너는 항상 너 자신을 외부 사물처럼 밖에서 바라볼 거야. 어떤 때는 화를 내고 어떤 때는 슬퍼하고 있는 너 자신을 인지할 거야. 마치 한 번은 비에 젖어 축축하고 한 번은 햇볕에 뜨거워진 네 외투처럼. 어떤 형태의 관찰로도 너는 기껏해야 네 뒤로나 돌아갈 수 있을 뿐 네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무엇을 하건 넌 네 밖에 머물러 있어. 다만 남들이 너에 대해, 네가 너 자신 바깥에 있다고 말해주는 몇 안 되는 순간만 예외일 거야. 그런데 성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든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해. 그게 내킬 때면 언제든 말이야.
-373~374
울리히의 이야기를 보면 개인의 가치관이 생기 전에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생물학적 존재가 아닌 철학적 존재는 어찌 되었든 가치관이 형성된 이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물론 개인의 경험, 기질, 학습 등에 따라 계속해서 바뀔 수도 있지만, 짙게 형성된 성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판단의 기준이 되고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는 잣대가 된다.
“무수히 떠도는 반쪽들 가운데 어떤 게 자신의 반쪽인지 아는 사람은 없어. 그래서 일단 그렇게 여겨지는 반쪽을 잡은 다음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온갖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여. 그러다 마침내 그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지. 또 그러다 아이가 생기면 두 반쪽은 처음 몇 해 동안은 최소한 이 아이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믿어. 하지만 그 아이는 세 번째 반쪽일 뿐이야. 머잖아 두 반쪽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네 번째 반쪽을 찾으려는 그런 존재 말이야. 이렇듯 인류는 생리학적으로 계속 이등분되고, 원래 하나 됨은 침실 창문의 달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376~377
울리히의 관점으로 본 이성 간의 만남은 결국 하나 됨이 없다. 각각 개인의 만남 속엔 타협과 양보와 인내가 존재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원한다. 다툼은 대부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시작된다. 어느 누군가가 인내하거나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둘은 결코 하나 될 수 없다는 강력한 증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학문을 할 수 없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도덕적 훈련도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보다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타인에게서도 오롯이 자신을 느끼고, 뭔가 꽉 찬 것 같다가도 다시 텅 비어버리고…… 어딘가에서 출발했다가 어딘가로 다시 돌아오고……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382
아가테의 말처럼 인간은 혼란 속에 살아간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따르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때론 근면하고 때론 게으른, 때론 절제하다가도 때론 무절제한, 꽉 찬 듯하다가도 텅 비어버리는 그런 존재야말로 인간이 아닐까. 모든 것을 인정하게 되면 새로운 것을 찾기 힘들어지듯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철학의 최고의 질문이 아닐까. 아가테나 울리히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