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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Feb 04. 2024

제3부 천년제국으로(범죄자들)(19)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3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24. 아가테가 실제로 도착하다


“혼자 사는 사람은 약점이 있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아. 약점은 나머지 성격들과 섞이면서 녹아들거든. 하지만 둘이서 약점을 나누면 그건 공유되지 않은 특성들과 비교할 때 배나 눈에 잘 띄고 공개적인 고백에 가까워져.”
-361


같은 주거 공간에 혼자 사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부모, 형제, 친구 혹은 배우자와 함께 살 때엔 배려가 필요하다. 혼자만의 공간과 타인과 함께 사는 공간에는 온도 차이가 있다. 혼자만의 공간은 자유라면 타인과의 공간은 관심과 배려다. 사이가 좋을 때는 편한 공간이라도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엔 불편한 공간으로 변한다. 물리적인 공간은 인간의 심리 상태에 지배를 받는다. 불편함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 다시 말하면 자신의 주장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지나친 배려도 불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절벽 사이를 잇는 출렁다리를 조심히 걸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35. 샴쌍둥이


“뭔가가 내 관심을 끌려면 어떤 맥락의 일부여야 하고, 어떤 이념의 통제하에 있어야 해. 사실 난 경험 그 자체는 내 뒤에 갖고 싶어. 그러니까 기억으로 갖고 싶다는 뜻이지. 나는 경험이 요구하는 실질적인 감정 소비가 편치 않아. 가소로울 만큼 부적절해 보이기도 하고. 나 자신을 가차 없이 묘사하면 그렇다는 말이야. 사람들이 좀 젊을 때 갖는 지극히 본능적이고 단순한 이념은, 세상이 기다려온 새롭고 지독한 놈이 바로 자기라는 거야. 하지만 그런 이념은 삼십이 넘어서까지 지속되지는 않아!”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냐!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건 정말 어려워. 사실 나는 내가 계속해서 한 이념의 통제를 받아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 이념은 없었어. 사람은 이념을 여자처럼 사랑해야 해. 그리고 돌아가면 몹시 행복해지지. 인간에게 이념은 항상 자기 속에 있어! 그런데도 자기 밖의 온갖 것에서 이념을 찾으려고 해! 나는 절대 그런 이념들을 찾았던 게 아냐. 이른바 위대하다고 하는 이념들과 나의 관계는 항상 남자 대 남자의 관계였어. 아마 진짜 위대한 이념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나는 천성이 뭔가에 종속되는 걸 싫어해. 이념들은 내게 자신을 무너뜨리고 다른 이념을 자기 자리에 놓도록 자극했어. 그래, 나를 과학으로 이끈 것도 바로 그런 질투심이었을 거야.
-370~371


울리히가 특성 없는 남자가 된 이유가 보이는 부분이다. 이념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럼에도 밖에서 이념을 찾으려 한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 시간에 처음으로 접한 가치관이란 단어도 결국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릇된 가치관을 선택한 사람의 운명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계 2차 대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수많은 사람을 전쟁으로 내몰아 죽게 한 이념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종반부에 나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세계를 선물로 준다고 했지만, 죽음과 폐허와 먼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삶을 현실에서 온전하게 경험하게 되면 삶은 항상 낡은 방식으로 장황하고, 케케묵고, 생각의 알맹이 면에서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져.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다 비슷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초등학생에게 꽃들 사이로 즐겁게 뛰어놀라고 가르치는 방식으로 삶의 절박한 기쁨이 있는 것처럼 가장해. 하지만 거기엔 항상 어떤 의도가 있고, 느껴지기도 하지.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서로 진심으로 잘 지내는 것만큼이나 얼마든지 서로를 냉혈한처럼 죽일 수 있어. 우리 시대는 분명 이 시대에 가득한 사건과 모험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어. 그리고 그것들은 즉시 새로운 사건들을 조장해.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피의 보복이지.
-371


인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대부분 사후에 이루어진다. 자신의 행동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명분을 만들어 낸다. 그 이유를 대부분 타인의 행동이나 사건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선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라는 식이다. 관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원인의 대부분은 각각의 개인에게 존재한다. 인간이 감정의 존재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타인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타인의 그릇된 행동에 반응하지 않으려면 정말 커다란 인내가 필요하다. 평화를 위해서는 행동보다 인내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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