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만큼 죽는 것
매년 12월 25일.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성탄절을 보낸다. 부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인간은 죽은 후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 모습이 프랑켄슈타인과 같다면 과연 부활이라 말할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 성탄절에 인간의 원천적 두려움인 '죽음'에 관해서 생각해본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인류의 시작 이후 변하지 않는 진리와 같은 이 사실은 아무리 인식하고 있어도 막상 당면하게 되면 낯설고 곤혹스럽다. 삶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죽음 앞에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하루만큼 죽음에 다가간다는 이야기다. 망각의 속도가 늘어가면서 시간의 속도도 늘어간다. 설레는 감정이 사라지면서 시간도 사라져 간다. 오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삶의 의미를 무엇에서 찾으셨을까? 할머니는 많은 자녀를 두고도 외롭게 살다 가셨다.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의 효도의 방식을 바꿨고, 형제간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조선시대엔 삼종지도라 하여 여자가 어릴 적에는 아비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가면 자식을 쫓으라 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은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환경이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기도 하다.
죽음을 위한 준비는 무엇일까? 사람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 준비한다고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오늘을 열심히 살라는 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는 말, 건강을 지키며 살라고 하는 말, 이런 말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허겁지겁 살아간 후 지나간 일생을 돌아볼 때 열심히 살아서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우연히 태어났고, 살다가, 죽는다. 죽음에 준비란 없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하다가,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다.
영면에 드신 할머니의 명복을 빌며.
2014년 1월 3일 오후 3시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갔다. 관 위에 흙이 덮일 때 오열하던 이모도, 소리 없이 눈물 흘리던 친척 동생도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무덤을 뒤로하고 온지도 5년이 다 되어간다. 할머니는 다시 부활하셨을까? 부활은 인간이 아닌 신에게만 주어진 특권일까.
세상엔 아픈 사람이 정말 많다. 회복을 바라는 환자. 반대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 아프진 않아도 인간은 모두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가 아닌가. 입원 중인 어머니를 위해 기저귀를 사들고 가는 의사 아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목에 수술 후 50 바늘은 족히 넘어 보이는 꿰맨 흔적에도 약물과 기기를 주렁주렁 달고 병원 복도를 걷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에겐 징글벨이 울리고, 누군가에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이어지고, 가슴이 미어지지만 울면 안 되는 사람, 그 와중에도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달라고 조르고 싶은...... 회복의 선물을......
유병천.